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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黃玹)과 그 아우 황원(黃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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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sundol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43회 작성일 20-06-2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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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1855~1910)과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동시대에 살았던 둘의 삶은 닮은 점이 많다.

특히 두 사람에게는 형만 한 아우가 있었다.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인정받는 고흐에게 경제적 후원자이면서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한 동생 테오(1857~1890)가 있었다면,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 불리는 매천에게는 형의 수많은 문장과 순절을 빛나게 한 동생 황원(黃瑗, 1870~1944)이 있었다.

매천과 석전, 의좋은 형제는 닮았다.

매천의 동생 황원은 형보다 15살 연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형 매천으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매천의 여러 제자 중에 학문적 재능이 으뜸이었다. 그의 나이 23세에 부친을 여의고 이듬해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형을 부모처럼 모시며 평생 형의 곁에서 동고동락하였다.

피는 속일 수가 없다. 형제는 외모나 체질이 거의 같았다. 매천도 건강한 체질이 아니어서 약단지를 옆에 끼고 사는 신세였지만, 동생 황원의 건강은 더욱 좋지 않았다. 황원의 사진을 보면 깡마른 몸매와 파리한 혈색에 시력까지 나빠 두꺼운 돋보기를 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인들의 회고에 의하면, 평생에 황원처럼 다병(多病)한 이가 드물었다고 한다. 형 매천은 건강이 안 좋은 동생을 극진한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다.

1903년 가을에는 동생 황원이 딸만 셋 낳은 끝에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하는 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고, 황원이 보내온 시에 운을 따서 화답시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 시 중에 ‘나를 위하여 부지런히 약 캐느라, 아우는 만수산 산속에 있구나(爲吾勤采藥, 弟在萬山中)’라는 구절을 통해서, 애년(艾年, 머리털이 약쑥같이 희어진다는 뜻으로, 쉰 살을 의미함)의 나이를 앞둔 형의 건강을 위하여 동생 황원도 산속에서 약초를 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줄지 않는 볏가마니’에 나오는 의좋은 형제를 보는 듯하다.

황원, 항일에 생애를 바치다.

1910년 9월 10일 매천이 순절한 이후, 황원은 형의 순절을 세상에 알리고 계승하는데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형 매천처럼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굽히는 법이 없이 당당하였던 황원은 감히 의가 아니면 행동하지 아니하였다. 황원의 천성은 굳세고 행실은 간소하였고, 유창한 말은 명쾌하여 강물을 거꾸로 달아 놓은 듯하였고, 강한 기운은 창해의 고래도 잡을 기세였다.

1911년 봄,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친구 김상국과 함께 상경하여 여규형을 방문하였다. 때마침 여러 사람이 자리를 같이하였는데, 그중 한사람이 황원이 시골 출신임을 알고 벽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를 가리키며, “시골에도 저런 신품이 있습니까?” 하였다. 황원은 “시골에도 괘종뿐만 아니라 다른 신품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 와서 보니 시골에서 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후백자남(公候伯子男)이요.” 하였다. 모여 앉은 사람들 가운데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이들이 있었으므로 낯빛이 붉어지며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 황원의 묘.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에 있다. 2009년 봄 광양 석사리 선산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1912년 겨울, 『매천집』이 국내에 유포되는 과정에 총독부로부터 압수를 당하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원은, 1919년 총독부에 『매천집』을 다시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뜻밖에 <총독부가『매천집』을 보내와서 시로써 대신 감사드림(自總督府求送梅泉集以詩代謝)>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보냈다.

시 제목만으로는 『매천집』을 돌려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작품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은 이미 전국에 배포된 『매천집』은 각 집에서 감추어 다 수거할 수 없을뿐더러, 일제의 압제가 끝나면 다시 햇빛을 볼 것이라는 확신을 밝히고 있는 내용이었다. 황원의 당찬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황원은 매천의 둘째 아들인 조카 황위현 등이 구례의 3 · 1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민족 유일당 운동의 차원에서 조직된 신간회 구례지회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데 배후 지원 역할을 하였다. 조카 위현이 태극기를 만들어 구례 장날 만세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순사에 끌려가서, 심지어는 집에서조차 문초를 당하였지만, 황원은 그 상황을 의연하게 이겨내었다. 일제는 매천 못지않은 기개와 절의를 지닌 황원을 두려워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달래고 회유하려 하였다.

스스로 ‘강호여인(江湖旅人)’이라 이름 하다

황원의 삶은 일제와 한 치의 타협이 없는 치열함 그 자체였다. 황원은 경술국치 이후 스스로 ‘강호여인(江湖旅人)’이라 이름 하고, 갓 거꾸로 쓴 헌걸찬 모습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1928년 김시중에게 보낸 시에서는 “망국의 백성에겐 자유가 없나니,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수사의 대상이다.”라며 망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고백하고 있다.

1930년에는 조선 총독인 사이또 미노루(齋藤實)가 구례경찰서장에게 친서를 보내 석전과의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끝까지 거절하였다. 1936년, 진주 촉석루시사(矗石樓詩社) 공모전에서는 「촉석루음사원운(矗石樓吟社元韻)」이라는 작품을 아들 양현의 명의로 출품하여 2등으로 입상하였으나, “살아남은 늙은 백성 통한만 쌓이네.”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어 1개월간 구속 수감되기도 하였다.

71세 되던 1940년에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황원은 가솔들을 모아놓고 “우리 집안은 역사를 가진 대한국인일 뿐만 아니라 누세충열의 사족이라, 죽음으로써 항거할 때이니 겁내지 말라.”라고 하고, 문패를 강호여인(江湖旅人)이라 바꾸고는 끝내 불응하였다.

동생 황원, 순절하여 형의 무덤 곁으로 가다.

일제의 포악이 극에 달하던 1943년 10월 중순, 황원은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하였다. 이듬해 음력 2월 17일, 그는 경분(輕粉, 염화제일수은)을 먹고 집 뒤에 있는 월곡 저수지에 뛰어들어 마침내 운명하였다.
 

▲ 구례 월곡저수지. 1944년 음력 2월, 황원은 월곡(방광) 저수지에 뛰어들어 운명하였다. 제방 가운데 소나무 숲 아래에 매천사가 있다. 

 

사후에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절명시(絶命詩)」첫머리에는,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도로써 몸을 따르게 하고,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몸으로써 도를 따르게 하라(天下有道以道殉身, 天下無道以身殉道).”는 『맹자』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 형 매천이 인(仁)을 이루기 위해 순절하였던 것처럼, 이번에는 동생 황원이 도(道)를 지키기 위해 순절하였다. 형제는 그렇게 목숨을 바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황원은 형만 한 아우였다.

황원은 지인들로부터 주로 ‘계방(季方)’으로 불렸다. 매천의 ‘사내 동생’이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동생 황원의 삶은 형 매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살아서 형 매천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동생 황원은, 죽어서도 광양에 있는 형의 무덤 가까운 곳에 묻혔다. 현재 매천의 무덤이 있는 석사리 장수 황씨 선산에는 매천의 할아버지 황직 이후 5대의 무덤이 모여 있다. 그 중 동생 황원의 무덤은 2009년 봄에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해 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황원에게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어 국립묘지로 이장한 듯한데, 조금은 서운하기도 하다. 유족들이 허락한다면 황원의 무덤을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면 좋겠다.


<한시 속으로>
▲ 황원의 시, 구례군 광의면 매천사 앞 월곡마을 회관 건물 처마 아래에는 1920년 강호여인(황원의 호)이 지은 시가 있다.
溪邊小塾豁然空
시냇가 작은 글방 텅 비어 있고
明月長風大埜中
너른 들판 가운데 바람 불고 달빛 내리네
方丈白雲千萬疊
방장산과 백운산은 천만 겹으로 펼쳐지고
峰峰秋色送飛鴻
가을 빛 산봉우리 너머 기러기 날아가네

庚申(1920) 秋日 江湖旅人
경신년 가을 강호여인 짓다.


절명시(絶命詩)
황원(黃瑗)

滄海滔滔日倒流 푸른 바다 넘치고 날은 거꾸로 흐르는데
蒼生不救竟無謀 백성을 구하지 못하고 마침내 꾀도 다하였네
空老人間無一補 헛되이 늙은 인간은 조금도 보탬이 안 되니
不如先去帝京遊 먼저 하늘나라에 가 노는 것만 못하구나

國已邱墟民又亡 나라는 이미 폐허가 되었고 백성 또한 망했는데
何必忍辱守書床 구태여 욕을 참고 책상만 지키고 있으랴
小事營營如大事 작은 일도 큰일처럼 분주하게 쏘다녔으나
丈夫志氣愧田光 대장부의 기개는 전광에 부끄러울 뿐이네

 

▲ 황원 초상화. 위의 사진을 보고 그린 초상화이다. 오른쪽에 석전 황원이 자신의 사진을 보고 쓴 시가 적혀 있다. 글씨를 쓴 이는 황원의 아들 양현으로 추정된다.
石觀小照
석전산인 황원이 자기 얼굴을 보다
可友者藺相如
벗 삼을 만한 사람은 인상여이고,
可讀者戰國策
읽을 만한 책은 전국책이로다.
所交一世名士
사귀는 사람은 당대의 명사이고,
所取居故韓山澤
사는 곳은 옛날 우리나라의 산천이로다.
有時拍案狂歌
때로 책상을 치며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지만
終非羽人劒客
끝내 부단히 학문을 연마하여 되려던 신선은 되지 못했네.

      

출처 : 광양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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