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開土大王陵碑의 새로운 解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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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0회 작성일 21-02-26 11:56본문
광개토태왕릉비에 나타난 고구려와 왜(倭) / 광개토태왕릉비에 대한 새로운 연구 - 이찬구
저자는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탁본을 대조 검토하였다. 그 결과 가장 오래된 탁본인 구로다(黑田) 탁본과 프랑스인 샤반느(Chavannes) 탁본을 비교한 바, 신묘년(391)조 기사인 而倭以(이왜이)의 왜(倭)자가 크게 손상된 것을 발견하였다. 이는 이진희의 변조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처음으로 본래 임금 제(帝)자를 왜(倭)자로 변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래 而帝以(이제이)였는데, 이를 而倭以(이왜이)로 일제가 변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신묘년은 서기 391년으로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해이다. 태왕의 즉위년에 대한 기록에 남의 나라 왜(倭)자가 들어올 이유가 없다. 본래부터 왜(倭)자였다면 그 글자가 일제에 의해 손상될 리가 없었을 것이다. 현 탁본상의 而倭以(이왜이)를 而帝以(이제이)로 바로잡고, 또 빠진 글자를 破百殘連倭(파백잔연왜)로 보결하여 해석하였다. 아울러 경자년(400)조 기사를 통해 임나(任那)가 일본 열도에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일제가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이 거짓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기존 학설- 광개토태왕릉비는 현재의 중국 집안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아버지인 광개토태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건립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전인 장수왕 2년(414)이다. 응회암(凝恢岩)으로 만든 이 비석은, 높이 6.39m에 무게가 39톤에 달한다. 울퉁불퉁한 표면에 바둑판처럼 선을 반듯하게 그은 뒤 14×15㎝ 정도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한자를 새겨 넣었다. 글씨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예서체(隸書體)이다. 동양 최대의 거석기념물이며, 가장 오래된 실물 사료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730 여년 앞선 중요한 기록물이다. 지금은 중국의 주도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이라는 이름으로 광개토태왕릉비, 장군총, 국내성, 무용총 등 43건이 일괄 등록되어 있다. 내용은 고구려의 창건과 왕계(王系)의 유래와 비석을 세운 이유, 광개토대왕 생전의 대내외 업적,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며 논의되었던 부분은 신묘년조(辛卯年條)의 해석과 이를 둘러싼 비문에 대한 일제의 변조 여부였다.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로 알려진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 신라이위신민(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라는 구절의 해석을 놓고 동양 삼국이 논쟁을 벌였다. 특히 일본은 1883년에 사카와[酒句景信]중위가 처음으로 입수해온 쌍구가묵본을 집중연구하여 1889년에 자국에 유리한 해석을 내놓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비문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그 해석을 토대로 조선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사료로 활용하였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억지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로 삼아왔던 것이다. 지금도 일본은 그런 침략적 해석을 유지하고 있고, 청소년들에게 과거에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여 식민지를 경영하였다고 왜곡해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정인보(鄭寅普)은 이 구절 중에 도해파(渡海破)의 주체를 고구려 광개토태왕으로 보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신민(臣民)의 주체는 왜가 아니고 고구려라고 주장하였다. 이 신묘년조 기사를 비롯한 비문의 해석은 1970년대 재일(在日)동포 사학자인 이진희(李進熙)에 의해 일제 군부의 비문 변조설이 제기되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의 석회도부설은 설득력을 얻었으며, 중국학자 왕건군(王健群)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결론- 1889년 이래 이제까지 일본측이 주장해온 원문과 해석이다 (일본측 주장)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일본측 해석) 우리 일본이 신묘년(AD 391)에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을 삼았다. 이에 대해 저자가 바로 잡은 신묘년조는 "이제이 신묘년래 도해파백잔연왜 신라이위신민(而帝以 辛卯年來 渡海破百殘連倭 新羅以爲臣民)"이며, 그 원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원문)而帝以 辛卯年來 渡海破百殘連倭 新羅以爲臣民 (해석)임금(태왕)께서 신묘년에 등극한 이래로 수년 동안에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어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비문의 주어가 고구려 광개토태왕이라는 것과 당시 삼국과 왜와의 국제적 친소 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고구려는 백제와 왜를 공격의 대상으로 보았고, 신라를 보호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것이 당시 고구려 대외 정책의 골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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