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1947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을 역임했다.
60여년간 대흥사, 진불암, 상원암, 남미륵암, 월출산 상견성암, 백장암, 벽송사, 백운산 사성암,
혜운사, 태안사 등의 토굴에서 묵언과 일종식 및 장좌불와 수행에 전념했다.
60세가 넘어 토굴생활을 끝낸 스님은 1985년부터 10여년간 폐찰이 되어가던 태안사를 중창했다.
그동안 해외와 한국 등지를 다니며 불법(佛法)을 전했다.
많은 스님과 불자들은 청화스님에 대해 ‘자비행(慈悲行)’이 끝이 없는 어른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스님이 광주 추강사에 주석하던 시절의 일화이다.
대중들이 먹을 쌀이 2~3일치 밖에 남지 않아, 방안을 찾기 위해 대중들이 공사(公事)를 하던 어느날
객스님 한분이 찾아왔다. 청화스님은 주저함이 없이 쌀독에 남아 있는 쌀을 객스님 걸망에 담아주었다.
또 한번은 두륜산 진불암에 머물 때의 일이다.
어느날 갑자기 절을 찾아온 낯선 스님을 위해 손수 40리 거리인 해남까지 내려가 제물을 준비해 와
제사의식 가운데 절차가 제일 복잡하다고 하는 구병시식을 베풀어 주었을 정도이다.
이처럼 보통 정성으로는 하기 힘든 자비행을 실천했던 스님이 청화스님이다.
때문에 “청화스님은 자비의 화신이고 보시바라밀의 산 귀감이다”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님은 교학에도 두루 밝았다. 스님이 직접 저술하거나 역주한 경전이나 저서도 여러권 남겼다.
<정통선의 향훈> <원통불법의 요체> <마음의 고향> <진리의 길> <가장 행복한 공부> 등은 손수 지었고,
<약사경> <정토삼부경> <육조단경>은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밖에도 은사 금타스님의 저술을 모아 <금강심론>을 펴내는 등
부처님 가르침을 많은 불자들이 쉽고 바르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청화스님은 참선, 염불선, 교학을 기반으로 대중들에게 자비심을 근간으로 불법을 폈다.
스님은 포교에도 남다른 원력을 지니고 있었다.
직접 창건한 도량만 해도 무안 혜운사, 두륜산 상원암, 월출산 상견성암,
서울 광륜사, 미국 금강선원 등 10여개에 이른다.
스님은 도량을 열면 ‘가장 청정한 도량’ ‘가장 엄정한 계율’ ‘초인적인 용맹정진’ 등
세 가지의 도량신조(道場信條)를 강조했다.
스님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오고가는 것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 할 뿐이네.
차세타세간 거래불상관(此世他世間 去來不相關) 몽은대천계 보은한세간(蒙恩大千界 報恩恨細澗)”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2003년 11월12일 주석중이던 전남 곡성 성륜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법호는 무주(無住)이며 법납 56세. 세수 81세.
"여러분들은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수행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다시 보는 법문- 청화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