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경전 / 김종제
대부도 바닷가 언덕 위에
검붉은 경전이 펼쳐져있다
그 옛날, 최초의 말씀을 적어놓은
상형문자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우리네 삶이란
황무지를 일구며 돌을 골라내고
씨 뿌리는 일이 아닌가
제멋대로 돋아난 풀을 뽑아내고
충만한 열매 어여 보고 싶어서
물 주는 일 아닌가
포도 한 송이 속에
햇살이나 바람이나 가득하여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생이 때때로 궁금하다고
키 낮은 포도밭으로 들어가
게송으로 되읽으면
무상한 생이 달콤할 것 같아
바닷가 언덕을 한참 거니는데
발 아래 펼쳐진 푸른 물밭에도
잘 익은 포도 같은
물고기를 숨겨놓았으리라
세상의 모든 밭은 경전이라서
목숨으로 얻어낸 말씀으로
포도밭이 가득하여
당신에게 귀의하겠다고 무릎을 끓는데
포도 한 송이가 머리를 툭 친다
1993 ≪자유문학≫ 등단
시집으로 <흐린 날에는 비명을 지른다>,
<바람의 고백>,
<내 안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이여>,
<따뜻한 속도 2011> 等
---------------------------------
<감상 & 생각>
바닷가 언덕 위 포도밭에서 만나는 생명의 경전(經典),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 자연에 귀의(歸依)한다
한 폭의 풍경 속에서 머리를 툭 치는, 포도 한 송이
가히, 압권(壓卷)이다
깊은 산속 선방(禪房)에만 확연개오(確然開梧)가
있는 줄 알았는데 詩를 감상하니 사방 천지
세상의 모든 밭, 선방 아닌 곳이 없다
<시인에게 드리는 말씀>
대부도 바닷가 언덕 위에는 그런 포도밭이 있었군요. 우선, [ 검붉은 경전이 펼쳐져있다 ]이라는 行과 함께 [ 최초의 말씀을 적어놓은 상형문자 ]라는 표현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참으로, 시의 초반부터 신선한 매력으로 독자를 매료魅了시킵니다.
연이어, 물 흐르는 듯 삶에 관한 자연스러운 진술은 자못, 人生을 아는 넉넉한 가슴의 토로吐露라는 생각도 들구요.
포도 한 송이 속에 가득한 햇살이나 바람(風)을 말함에, 그 탄탄한 서술적 형상력과 함축성이 짜릿한 느낌으로 가슴을 파고 드는데요.
[ 키 낮은 포도밭으로 들어가 게송偈頌으로 되읽으면 ]에 이르러서는, 시적 공간이 그 어떤 선禪의 경지境地로 환하게 넓어지면서 어머니 자연이 펼쳐내는 생명의 경전經典 앞에 이르고.
話者는 이윽고, 경외로움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귀의歸依하는데... 머리를 툭 치는 포도 한 송이가 압권壓卷입니다.
좋은 시 덕분에... 어수선한 삶에 번거로웠던,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혀 봅니다.
- 안희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