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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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원서
공명하시며 정대하신 재판장님. 언제나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시는 노고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미 수 많은 업무에 눌려 계심을 알기에 이리 제 탄원서로 짐을 더해 드림이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재판장님 앞에 서 있을 그 자의 처지에 관해 연민하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설명드릴 사람이 저 말고는 없을 것 같아 무거운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 자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가 재판장님 앞에 선 그 가련한 자를 탄원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기 전에 그 자의 삶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사주를 믿지는 않지만 그의 사주는 정화(丁火) 라고 합니다. 불, 철을 녹여 두드리는 불,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불.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집은 유복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아비는 이 일 저 일 찾아 헤매는 잡부였고, 어미는 옥수수와 얼음물을 팔았습니다. 어릴 적엔 부모를 따라 여기 저기로 자주 옮겨다녔습니다. 그의 부모는 성실하고 또 성실했기에 그는 종종 함께였고 자주 혼자였습니다.
현명하신 재판장님. 그 자는 어려서부터 큰 재능을 보인 분야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운동이든 미술이든 재능의 영역에서 그는 딱 평균의 선에서 줄을 타는 아이였습니다. 관심일지 칭찬일지 눈길을 받기 제일 쉬운 건 공부였습니다. 재능 보다 약간의 노력으로 보일 수 있는 성적, 성적이었습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으레 그렇듯 어른들은 줄세우기를 좋아했습니다. 조금 더 높은 성적, 조금 더 좋은 대학 경쟁 속에서 그가 배운 건 열등감이고 그보다 잘난 사람에게 눈을 흘기는 방법이었습니다. 질투와 열등감은 그가 모든 것을 태워 없애고자 한 이유였을지 모릅니다. 그는 잠못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열등감이 야기한 시기와 질투가 큰 불이 되어 주변 사람을 불사르고 매일 밤 뜨거운 가슴으로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불은 분노와 닮았습니다. 일순간 일어 주변을 태우고는 종국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외로웠나 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는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그 뿐이었습니다.
자애로우신 재판장님. 그 자는 운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길을 가다 널브러진 개똥을 밟거나 새똥을 맞거나 접촉사고가 나거나, 액땜했다 치며 다가올 운을 기대할 불운이 아니라, 스스로 운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운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그 뿐입니다. 그 자의 곁에 그 자를 돌볼 사람이 없을 뿐이었습니다. 재판장님,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의 불운은 거대한 불운보다 슬픈 일입니다. 희망마저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자는 자신의 불운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정의로우신 재판장님. 그 자는 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가득한 모순과 불의에 민감했고 분노했습니다. 다만 그는 작은 시민일 뿐이어서 그는 그의 손이 닿는 데까지만 분노했습니다. 소시민의 분노만큼 지루하고 멸렬한 것은 없어 그는 내내 견뎌야 했습니다. 주위를 불사르고 아무도 없을 때까지 그는 괴로워했습니다. 그의 하늘엔 바람에 스칠 별이 없어도 희뿌연 먼지 속에서 그는 괴로워했습니다.
전지하신 재판장님. 재판장님께서는 입자가속기를 아십니까? 다를 것 없는 입자가 빠른 속도로 부딪히자 인간은 양자의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다를 것 없는 보통의 사람이 그를 괴롭게하고, 분노케하고, 외롭게 한 다를 것 없는 세상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곳에 선 겁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는데 인간은 무엇 때문에 추락하는 겁니까? 애초에 날개란 없었던 인간은 가속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 위해 추락합니다.
재판장님, 도망쳐 도착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또 다른 지옥일지라도 그는 기꺼이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재판장님, 그를 조금만 가련히 여기소서. 단지 그 뿐입니다.
댓글목록
정민기09님의 댓글

우리 모두가 "외로운 사람"입니다.
Usnimeel님의 댓글의 댓글

언젠가 우리 모두 외로이 재판장에 섰을 때 안타깝게 여겨 탄원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물박사님의 댓글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