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 모음 101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나태주 시 모음 101편
☆★☆★☆★☆★☆★☆★☆★☆★☆★☆★☆★☆★
《1》
가보지 못한 골목길을
나태주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그리워하면서 산다
알지 못한 꽃밭,
꽃밭의 예쁜 꽃들을
꿈꾸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려지는 일이겠니
☆★☆★☆★☆★☆★☆★☆★☆★☆★☆★☆★☆★
《2》
가시나무 새의 슬픈 사랑이야기
나태주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모를 것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변방의 둘레를 돌면서
내가 얼마나 너를 생각하고 있는가를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까마득 짐작도 못할 것이다.
겨울 저수지의 외곽길을 돌면서
맑은 물낯에 산을 한 채 비춰보고
겨울 흰 구름 몇 송이 띄워보고
볼우물 곱게 웃음 웃는 너의 얼굴 또한
그 물낯에 비춰보기도 하다가
이내 싱거워 돌멩이 하나 던져 깨드리고 마는
슬픈 나의 장난을
2.
솔바람 소리는 그늘조차 푸른빛이다.
솔바람 소리의 그늘에 들면 옷깃에도
푸른 옥빛 물감이 들 것만 같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조차 그만
포로소롬 옥빛 물감이 들고 만다면
어찌겠느냐 어찌겠느냐.
솔바람 소리 속에는
자수정빛 네 눈물 비린내 스며 있다.
솔바람 소리 속에는
비릿한 네 속살 내음새 묻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 마음조차 그만
눈물 비린내에 스미고 만다면
어찌겠느냐 어찌겠느냐.
3.
나는 지금도 네게로 가고 있다.
마른 갈꽃내음 한 아름 가슴에 안고
살얼음에 버려진 골목길 저만큼
네모난 창문의 방안에 숨어서
나를 기다리는
빨강 치마 흰버선 속의 따스한 너의 맨발을 찾아서
네 열게 발가락의 잘 다듬어진 발톱들 속으로.
지금도 나는 네게로 가고 있다.
마른 갈꽃송이 꺾어 한 아름 가슴에 안고
처마 밑에 정갈히 내건 한 초롱
네 처녀의 등불을 찾아서.
네 이쁜 배꼽의 한 접시 목마름 속으로
기뻐서 지줄대는 네 실핏줄의 노래들 속으로
☆★☆★☆★☆★☆★☆★☆★☆★☆★☆★☆★☆★
《3》
가을 어법
나태주
가을은 우리에게
경어를 권장한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잘 견디셨습니다
먼 길 오느라 힘드셨겠어요
짐까지 무겁게 들도 오셨군요
가을은 우리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허락한다
그래, 그래, 애섰구나
잘 참아줘서 고마웠단다
이제 좀 쉬어라
쉬어야 다시 또 떠날 수 있지
가을의 햇빛과 바람은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치고
화해를 요구한다
낙엽들도 그렇게 한다
☆★☆★☆★☆★☆★☆★☆★☆★☆★☆★☆★☆★
《4》
가을 햇살 앞에
나태주
고개를 숙여라
더욱 고개를 숙여라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 있다면
그것부터 놓아라
스스로 편안해져라
너 자신을 쉬게 하고
위로하고 기꺼이 용서하라
지난여름
또다시 싸움만
힘든 날들이었다
이제 방 안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햇살
우리 마음도 따라서
고요해질 때
가을은, 가을 햇살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부드러움을 요구한다
☆★☆★☆★☆★☆★☆★☆★☆★☆★☆★☆★☆★
《5》
가을날
나태주
하늘 강물을 건너가는
흰 구름이 발길 멈춰 서서
내게 조용히 물었다
아직도 한 사람이 그렇게도 좋아
연애편지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면서 견디고 있느냐고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해줬더니
사실은 자기도 그런 형편이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6》
가을축제
나태주
좋았어요
아주 좋았어요
짧은 가을날
짧은 가을날 사랑
그렇지만 향기는
오래 남았어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울면서 날아갑니다
☆★☆★☆★☆★☆★☆★☆★☆★☆★☆★☆★☆★
《7》
가을햇살 앞에
나태주
고개를 숙여라
더욱 고개를 숙여라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 있다면
그것부터 놓아라
스스로 편안해져라
너 자신을 쉬게 하고
위로하고 기꺼이 용서하라
지난여름은
또다시 싸움판
힘든 날들이었다
이제 방안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햇살
우리 마음도 따라서
고요해질 때
가을은. 가을 햇살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부드러움을 요구한다
☆★☆★☆★☆★☆★☆★☆★☆★☆★☆★☆★☆★
《8》
강물과 나는
나태주
맑은 날
강가에 나아가
바가지로
강물에 비친
하늘 한 자락
떠올렸습니다
물고기 몇 마리
흰구름 한 송이
새소리도 몇 움큼
건져 올렸습니다
한참동안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믿음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을
기르다가 공연스레
죽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나는 걸음을 돌려
다시 강가로 나아가
그것들을 강물에
풀어 넣었습니다
물고기와 흰구름과
새소리 모두
강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날부터
강물과 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
《9》
개나리 꽃대에
나태주
개나리 꽃대에 노랑불이 붙었다. 활활.
개나리 가늘은 꽃대를 타고 올라가면
아슬아슬 하늘 나라까지라도 올라가 볼 듯
심청이와 흥부네가 사는 동네 올라가 볼 듯
☆★☆★☆★☆★☆★☆★☆★☆★☆★☆★☆★☆★
《10》
겨울 소나무
나태주
십 리 길 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갔다오던 식전의 언덕길에서
몇 그루의 소나무를 만났다.
항상 무심히 지나쳐보던 그들이지만
배고픈 내가 보아 그런지
그들은 모두 배고파 허기진 사람들 모양이었다.
내가 도회가 싫은 시골 촌놈이라 그런지
그들도 먼 불빛의 도회에서
밀려온 사람들 같았다.
아니면
흉년 든 어느 해 겨울
굶고 얼어죽은 사람들의 원귀들일까?
부황난 사람들의 머리칼일까?
소나무들은 눈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
천년도 더 묵은 울음을 울며
어쩌면 한마디 구성진 콧노래라도
골라내어 부르는 성싶었다.
아침 바람에 내가 허리 시려 그런지
그들도 몹시 허리가 시리운 듯
구부정히 모로 버티어 서 있었다.
☆★☆★☆★☆★☆★☆★☆★☆★☆★☆★☆★☆★
《11》
겨울 연가
나태주
한겨울에 하도 심심해
도로 찾아 꺼내 보는
당신의 눈썹 한 켤레.
지난 여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그것들.
움쩍 못하게 얼어붙은
저승의 이빨 사이
저 건너 하늘의 한복판에.
간혹 매운 바람이 걸어 놓고 가는
당신의 빛나는 알몸.
아무리 헤쳐도 헤쳐도
보이지 않던 그 속살의 깊이.
숙였던 이마를 들어 보일 때
눈물에 망가진 눈두덩이.
그래서 더욱 당신의 눈썹 검게 보일 때.
도로 찾아 드는
대이파리 잎마다에 부서져
잔잔히 흐느끼는
옷 벗은 당신의 흐느낌 소리.
가만가만 삭아 드는 한숨의 소리.
☆★☆★☆★☆★☆★☆★☆★☆★☆★☆★☆★☆★
《12》
겨울 초입
나태주
겨울 초입에 마늘촉을 텃밭에 심듯
내 가슴 흙을 후비고 너의 생각을 깊이 묻었다.
봄 되면 마늘촉 트듯 너의 생각에 새싹이 틀까?
추운 겨울을 그것만으로도 춥지 않게 살았다.
☆★☆★☆★☆★☆★☆★☆★☆★☆★☆★☆★☆★
《13》
겨울 햇볕은
나태주
겨울 햇볕은 떨어져 새로 움나는 참게 발가락
불그레한 게 움질움질 눈물겹다
겨울 햇볕은 구덩이에서 갓 파낸 무우 새순
노리끼리한 게 고물고물 눈물겹다
☆★☆★☆★☆★☆★☆★☆★☆★☆★☆★☆★☆★
《14》
겨울 흰 구름
나태주
아직은 떠나갈 곳이
쬐끔은 남아 있을 듯싶어,
아직은 떠나온 길목들이
많이는 그립게 생각날 듯싶어,
초겨울 하늘 구름 바라 섰는 마음
단발머리 시절엔
나 이담에 죽으면 꼭 흰구름이 되어야지,
낱낱이 그늘 없는 흰구름 되어
어디든 마음껏 떠다녀야지,
그게 더도 말고 단 하나의 꿈이었지요
그렇게 흰구름이 좋았던 거예요
허나, 이제 남의 아내 되어
무릎도 시리고 어깨도 아프다는 그대여
어쩌노?
이렇게 함께 서서 걸어도
그냥 섭섭한 우리는 흰구름인 걸,
그냥 멀기만 한 그대는
안쓰러운 내 처녀, 겨울 흰구름인 걸···
☆★☆★☆★☆★☆★☆★☆★☆★☆★☆★☆★☆★
《15》
겨울로 가는 길
나태주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나 무엇을 준단 말인가?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한 잔의 차 한 그릇의 음식
한 권의 책이나 구두 한 켤레가 아니다.
옷 한 벌이나 그런 것은 더욱 아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줄 수 있어야 했다.
내가 허락 받은 지상의
시간을 아낌없이
주더라도 아낌없이 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날로 해는 짧아지고
밤은 길어지고 있다.
그래도 나는 너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 마음으로 나는 지금
네 옆에 앉아 있다.
네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따라서 생각해보고
네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살피며
네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너도 내 옆에 잠시 편안한 마음으로
그렇게 좀 앉았다 가거라.
이것이 오늘의 내 소원이고 부탁이다.
☆★☆★☆★☆★☆★☆★☆★☆★☆★☆★☆★☆★
《16》
굴뚝 모퉁이
나태주
굴뚝 모퉁이
숯검정으로 눈썹 그린
굴뚝새랑
울밑에 머리 울음이 푼
겨울 각시풀이랑
손을 잡고
손을 맞잡고
더는 약해지지 말기를 ……
더는 쓰러지지 말기를 ……
겨울 논두렁길에
퍼런 입술
독새풀이랑
염소가 먹다 버린
콩깍지들이랑
등을 맞대고
어깨를 맞대고
너무 외로워 말기를 ……
너무 서러워 말기를 …….
☆★☆★☆★☆★☆★☆★☆★☆★☆★☆★☆★☆★
《17》
귀가 예쁜 여자
나태주
맞선을 본 처녀는 별로였다
살결이 곱고 얼굴이 둥글고
눈빛이 순했지만
특별히 이쁜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두 번째 만나던 날
시골 다방에서 차 한 잔 마시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아
가까운 산 소나무 그늘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산길을 내릴 때
앞서가는 처녀의 뒷모습
조그맣고 새하얀 귀가 예뻤다
아, 귀가 예쁜 여자였구나
저 귀나 바라보며 살아가면 어떨까? ?
그렇게 살아, 나는 이제
늙은 남자가 되었고
아내 또한 늙은 아낙이 되었다.
출처 : 시집 《어리신 어머니》(서정시학 2020)
☆★☆★☆★☆★☆★☆★☆★☆★☆★☆★☆★☆★
《18》
그냥 좋다
나태주
일 다 해 놓고
가을에 거둘 곡식들 다 심어 놓고
곡식이 자라기를 기다리는
망중한
들판에서 이웃들이랑 어울려
쉬고 있을 때
논과 밭 위로
곡식들 위로 불어오는
산들바람
밥을 지어 놓고 뜸이 들기를
기다리는 잠시
내가 숙였던 고개
다시 들기를 기다리는
그 잠시
그냥 좋다
☆★☆★☆★☆★☆★☆★☆★☆★☆★☆★☆★☆★
《19》
그리움
나태주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
☆★☆★☆★☆★☆★☆★☆★☆★☆★☆★☆★☆★
《20》
꽃들아 안녕
나태주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 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 번 옳다
☆★☆★☆★☆★☆★☆★☆★☆★☆★☆★☆★☆★
《21》
나무를 위한 예의
나태주
나무한테 찡그린 얼굴로 인사하지 마세요
나무한테 화낸 목소리로 말을 걸지 마세요
나무는 꾸중 들을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답니다
나무는 화낼만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답니다
나무네 가족의 가훈은 '정직과 실천'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싹을 내밀고 꽃을 피우고 또 열매 맺어 가을을 맞고
겨울이면 옷을 벗어버린 채 서서 봄을 기다릴 따름이지요
나무의 집은 하늘이고 땅이에요
그건 나무의 어머니 어머니 어며니 때부터의 기인 역사이지요
그 무엇도 욕심껏 가지는 일이 없고 모아 두는 일도 없답니다
있는 것만큼 고마워하고 받은 만큼 덜어낼 줄 안답니다
나무한테 속상한 얼굴을 보여주지 마세요
나무한테 어두운 목소리로 투정하지 마세요
그건 나무한테 하는 예의가 아니랍니다
☆★☆★☆★☆★☆★☆★☆★☆★☆★☆★☆★☆★
《22》
나무에게 말을 걸다
나태주
우리가 과연 만난 적이나 있었던 걸까
나무에게 말을 걸어본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가진 것을 모두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과연 우리가 만난 적이나 있었던 걸까
바람도 없는데 보일 듯 말 듯
나무가 몸을 비튼다.
☆★☆★☆★☆★☆★☆★☆★☆★☆★☆★☆★☆★
《23》
낙엽
나태주
나누어주고 싶어요
하나 하나씩
내려놓고 싶어요
하나 하나씩
내가 좋아한 사람
그도 나를 좋아한 사람
그에게 조금씩
돌려드리고 싶어요
☆★☆★☆★☆★☆★☆★☆★☆★☆★☆★☆★☆★
《24》
낯선 기차역에서
나태주
이만큼에서 멈추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염려
우리의 기쁨
조금씩 잊어버려야 한다
재잘재잘 즐겁게
이야기하며 타고 가던 기차
잠시 내려 서성인
기차 정거장
하늘 높이 자라난
자작나무 수풀
자작나무 수출 높은 가지에 높이 걸린 흰 구름
어디선가 들리는 새소리
하늘 속에선기
바람 속에선가
아, 흰 구름 속에선가
까마득 들리던 새소리
고개 돌리고 또 고개 돌려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새소리
그곳에 두고 오듯
우리의 사랑
우리의 슬픔
우리의 고뇌
아 가슴 벅차던 한때
우리의 기쁨
이제 잊어야 한다
그리하여 끝내 좋은
추억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좋았지요
당신 사랑했지요
때로는 우리가 서로
가슴 아프기도 했지요
모든 마음들 가슴에 끌어안아
늙은 나무 나이테
핏빛 무늬가 되게 해야 한다
낯선 기차역에서
기차를 멀리 먼저 보내고
터덜터덜 햇빛 밝은 길
걸어가면서
어디서 들리는 거라냐?
고개를 돌리고 돌려
두리번두리번
새소리를 찾아가면서
출처 : 《현대시학》 (2024년 11∼12월호)
☆★☆★☆★☆★☆★☆★☆★☆★☆★☆★☆★☆★
《25》
내가 꿈꾸는 여자
나태주
1
내가 꿈꾸는 여자는
발가락이 이쁜 여자.
발뒤꿈치가 이쁜 여자.
발톱이 이쁜 여자.
정말로 내가 꿈꾸는 여자는
발가락에 때가 묻지 않은 여자.
발뒤꿈치에 때가 묻지 않은 여자.
발톱에 때가 묻지 않은 여자.
그리고 감옥 속에 갇혀서
다소곳이 기다릴 줄도 아는 발을 가진
그러한 여자.
2
그녀의 발은 꽃이다.
그녀의 발은 물에서 금방 건져낸 물고기다.
그녀의 발은 풀밭에 이는 바람이다.
그녀의 발은 흰 구름이다.
그녀의 발은
내 가슴을 짓이기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녀의 발아래서
나의 가슴은 비로소 꽃잎일 수 있다.
그녀의 발아래서
나의 가슴은 비로소 흰 구름일 수 있다.
금방 물에서 건져낸 물고기일 수도 있다.
☆★☆★☆★☆★☆★☆★☆★☆★☆★☆★☆★☆★
《26》
내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나태주
내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흰 구름도 흰 구름이 아니요
꽃도 꽃이 아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새 소리도 새 소리가 아니요
푸른 하늘도 푸른 하늘이 아니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은 강물도
결코 그림이 될 수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
《27》
내가 사랑하는 계절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개끔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時祭 지내려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對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 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둥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 가을 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
《28》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태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슬퍼할 일을 마땅히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을 마땅히 괴로워하는 사람
남의 앞에 섰을 때
교만하지 않고
남의 뒤에 섰을 때
비굴하지 않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할 것을 마땅히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마땅히 사랑하는
그저 보통의 사람.
☆★☆★☆★☆★☆★☆★☆★☆★☆★☆★☆★☆★
《29》
내장산 단풍
나태주
내일이면 헤어질 사람과
와서 보시오,
내일이면 잊혀질 사람과
함께 보시오,
왼 산이 통째로 살아서
가쁜 숨 몰아 쉬는 모습을.
다 못 타는 이 여자의
슬픔을 …….
☆★☆★☆★☆★☆★☆★☆★☆★☆★☆★☆★☆★
《30》
너를 두고
나태주
세상에 와서
내가 하는 말 가운데서
가장 고운 말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가진 생각 가운데서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표정 가운데
가장 좋은 표정을
너에게 보이고 싶다
이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
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
《31》
너를 두고
나태주
세상에 와서
내가 하는 말 가운데서
가장 고운 말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가진 생각 가운데서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표정 가운데
가장 좋은 표정을
너에게 보이고 싶다
이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
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
《32》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조그마한 성공도 성공이다
그만큼에서 그치거나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
작은 성공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빌미 삼아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힘들게 하지 말자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주고
보듬어 껴안아줄 일이다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너, 너무도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출처 : 제49시집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중에서
☆★☆★☆★☆★☆★☆★☆★☆★☆★☆★☆★☆★
《33》
너에게 말한다
나태주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리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리
네가 나 없이는 세상을 살 수 없다고 말할 때
나는 너 없이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리
네가 내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쳤다고 말할 대
나는 꿈속에서도 너를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리
네가 나를 그리워했다고 말할 때
나는 너를 그리워하지 않았다고 말하리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네가 내 곁을 떠나겠다고 말할 때
나는 비로소 조용히 고개를 떨구리
☆★☆★☆★☆★☆★☆★☆★☆★☆★☆★☆★☆★
《34》
노래
나태주
노래는 어디에서 오는가?
마을에서도 변두리
변두리에서도 오두막집
어둠 찾아와
창문에 불이 켜지고
나무 아래 내어다놓은 들마루
그 위에 모여 앉아 떠들며
웃으며 노는 아이들
-거기에서 온다
노래는 어디에서 오는가?
한길에서도 오솔길
오솔길이 가다가 발을 멈춘 곳
도란도란 사람들 목소리
들려오는 오두막집
개구리래도 청개구리
따라서 노래 부르는 들창
-거기에서 온다
☆★☆★☆★☆★☆★☆★☆★☆★☆★☆★☆★☆★
《35》
노래
나태주
노래는 어디에서 오는가?
마을에서도 변두리
변두리에서도 오두막집
어둠 찾아와
창문에 불이 켜지고
나무 아래 내어다놓은 들마루
그 위에 모여 앉아 떠들며
웃으며 노는 아이들
-거기에서 온다
노래는 어디에서 오는가?
한길에서도 오솔길
오솔길이 가다가 발을 멈춘 곳
도란도란 사람들 목소리
들려오는 오두막집
개구리래도 청개구리
따라서 노래 부르는 들창
-거기에서 온다
☆★☆★☆★☆★☆★☆★☆★☆★☆★☆★☆★☆★
《36》
다락방
나태주
이담에 집을 마련한다면
지붕 위에 다락방 하나 달린 집을
마련하겠습니다.
문틈으로 하늘 구름도 잘 보이고
바람의 옷소매도 잘 보일 뿐더러
밤이면 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것도
곧잘 볼 수 있는
그러한 다락방을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속상하거나 답답한 날은
다락방에 꽁꽁 숨으렵니다.
그대도 짐작 못하고
하느님도 찾지 못하시도록.
☆★☆★☆★☆★☆★☆★☆★☆★☆★☆★☆★☆★
《37》
다시 산에 와서
나태주
세상에 그 흔한 눈물
세상에 그 많은 이별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으로 다시 와
정정한 소나무 아래 터를 잡고
둥그런 무덤으로 누워
억새풀이나 기르며
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앉아 있으리.
멧새며 소쩍새 같은 것들이 와서 울어주는 곳,
그들의 애인들꺼정 데불고 와서 지저귀는
햇볕이 천년을 느을 고르게 비추는 곳쯤에 와서
밤마다 내리는 이슬과 서리를 마다하지 않으리.
길길이 쌓이는 壯雪을 또한 탓하지 않으리.
내 이승에서 빚진 마음들을 모두 갚게 되는 날,
너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백발로 졸업하게 되는 날
갈꽃 핀 등성이 너머
네가 웃으며 내게 온다 해도
하낫도 마음 설레일 것 없고
하낫도 네게 들려줄 얘기 이제 내게 없으니
너를 안다고도
또 모른다고도
숫제 말하지 않으리.
그 세상에 흔한 이별이며 눈물,
그리고 밤마다 오는 불면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에 다시 와서
싱그런 나무들 옆에
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하늘의 천둥이며 번개들을 이웃하여
떼강물로 울음 우는 벌레들의 밤을 싫다하지 않으리.
푸르디푸른 솔바람 소리나 외우고 있으리.
☆★☆★☆★☆★☆★☆★☆★☆★☆★☆★☆★☆★
《38》
달밤
나태주
어수룩히 숙어진 무논 바닥에
외딴집 호롱불 깜박이는
산이 내리고
소나기처럼 우는
개구리 울음에
물에 뜬 달이 그만 바스라지다.
달밤.
안개는 피어서 꿈으로 가나,
물에 절은 쌍꺼풀눈
설운 네 손톱을,
한 짝은 어디 두고
홀로이 와서
입안에 집어넣고 자근자근 씹어주고 싶은
네 아랫입술 한 짝을,
눈물 아슴아슴
돌아오는 길.
어디서 아득히 밤뻐꾸기 한 마리
울다말다 저 혼자도 지치다.
나 혼자 이슬에 젖는 어느 밤.
☆★☆★☆★☆★☆★☆★☆★☆★☆★☆★☆★☆★
《39》
당신 때문입니다
나태주
하루를 살아도 나
곱게 숨 쉬는 사람임은 오로지
당신 때문입니다
뜨는 해를 보아도
작은 풀꽃 한 송이를 보아도
길 가다 문득 새소리를 듣다가도
나 눈물 글썽이는 소년임은
그 또한 당신 때문입니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네
우리가 나이 들어 세상 뜨기 전
알아야 할 진실은 다만 이것뿐
그대를 바라보며 한숨을 짓네.
☆★☆★☆★☆★☆★☆★☆★☆★☆★☆★☆★☆★
《40》
당신을 알고부터 시작된 행복
나태주
나의 삶에 지치고 힘들때 언제든지
찾아가 엉켜진 모든짐을 내려놓을수있는
당신을 알게되어 행복합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행복한날이
내생애 몇날이나 있을런지
하루살이 인생 이라면 그 하루의 전부를
주저없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루살이처럼 오늘만 살고 간다면
당신 허락없이 내 맘대로
당신을 사랑하다 가겠습니다.
세월이 말없이 흘러 가는것처럼
내마음은 큰 강물이 되어
당신에게로 흘러갑니다.
나는 당신 사랑해도 되냐고
묻지 않겠습니다.
나보더 훨씬 먼저
당신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죠.
이 세상 끝은 어디쯤일까?
궁금해 하지도 않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가는길은
시작과 끝이 같으니까요
당신을 알고부터 시작된 행복
이제는
매일 당신과 함께
호흡함에 행복합니다.
☆★☆★☆★☆★☆★☆★☆★☆★☆★☆★☆★☆★
《41》
대숲 아래서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
《42》
돌
나태주
돌에게도
사람들처럼
얼굴이 있다
돌에게도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이 있다
한참 동안
돌의 앞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돌이 먼저
입을 열어
말을 걸어온다
이보게 친구
자네도 무던히
망설이고 있네 그려.
☆★☆★☆★☆★☆★☆★☆★☆★☆★☆★☆★☆★
《43》
돌아갔다
나태주
남편 잃고 1년 되었는데
잊혀지지 않는다며
문학관 찾아와 울먹이는 초로의 아낙 하나 있었다
고작 1년인데 그렇게 빨리 잊고 싶으냐 말했더니
꼭 그건 아니라고 더욱 울먹였다
인사하고 돌아가면서 아낙은
며칠 뒤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 길 찾아
여행 떠난다고 말했다
가거든 그 길 위에 남편 생각 내려놓고
오라고 말했다가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차라리 남편과 둘이서 그 길을 걸어보라
고쳐서 말해주었다
걷다 보면 남편이 밖으로 나가든지
더욱 안으로 들어와 당신과 한 몸이 되든지
둘 가운데 하나가 될 거라 말해주었다
아낙은 더욱 붉어진 눈으로
그래 보고 나서 정말로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와서 말해주겠다며 돌아갔다
돌아가는 어깨가 그런 대로 씩씩했다.
출처 :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2023년 12월)
☆★☆★☆★☆★☆★☆★☆★☆★☆★☆★☆★☆★
《44》
돼지막
나태주
논산 육군 훈련소가 있는
연무대읍 뒷동네
꽃순이들 모여 살던 곳
밤에도 붉은 등 푸른 등
꺼지지 않던 수상한 골목
20년도 훨씬 지나
깊은 밤을 찾아가 보니
그 많던 꽃순이들 간 곳이 없고
푸른 등 붉은 등 불빛은 꺼진 지 오래
꽃순이 살던 집들은
돼지막이 되어 있었네
억울하게 팔려가기론
돼지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란 말인가……
☆★☆★☆★☆★☆★☆★☆★☆★☆★☆★☆★☆★
《45》
뒷모습
나태주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물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
시드는 노루발풀꽃, 솔바람소리
찌르레기 울음소리에게도
뒷모습은 있을까 ?
저기 저
가문비나무 윤노리나무 사이
산길을 내려가는
야윈 슬픔의 어깨가
희고도 푸르다
☆★☆★☆★☆★☆★☆★☆★☆★☆★☆★☆★☆★
《46》
들국화
나태주
바람 부는 등성이에
혼자 올라서
두고 온 옛날은
생각 말자고,
아주 아주 생각 말자고.
갈꽃 핀 등성이에
혼자 올라서
두고 온 옛날은
잊었노라고,
아주 아주 잊었노라고.
구름이 헤적이는
하늘을 보며
어느 사이
두 눈에 고이는 눈물.
꽃잎에 젖는 이슬.
☆★☆★☆★☆★☆★☆★☆★☆★☆★☆★☆★☆★
《47》
땅바닥 시화전
나태주
대학로 귀퉁이
아스팔트 바닥에
학생들이 그려 붙여 놓은
땅바닥 시화전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아
무심히 밟고 지나치지만
하느님 눈에는 잘 보여
허 그 녀석들 참
감탄하시며 내려다보시는
땅바닥 시화전.
☆★☆★☆★☆★☆★☆★☆★☆★☆★☆★☆★☆★
《48》
똥풀꽃
나태주
방가지똥풀꽃
애기똥풀꽃
가만히 이름을 불러 보면
따뜻해지는 가슴
정다워지는 입술
어떻게들 살아 왔니?
어떻게들 이름이나마 간직하며
견뎌 왔니?
못났기에 정다워지는 이름
방가지똥풀꽃
애기똥풀꽃
혹은 쥐똥나무,
가만히 이름 불러 보면
떨려 오는 가슴
안쓰러움은 밀물의
어깨.
☆★☆★☆★☆★☆★☆★☆★☆★☆★☆★☆★☆★
《49》
맑은 날
나태주
오늘날이 맑아서
네가 올 줄 알았다
어려서 외갓집에 찾아가면
외할머니 오두막 집 문 열고
나오시면서 하시던 말씀
오늘은 멀리서 찾아온
젊고도 어여쁜 너에게
되풀이 그 말을 들려준다
오늘 날이 맑아서
네가 올 줄 알았다
☆★☆★☆★☆★☆★☆★☆★☆★☆★☆★☆★☆★
《50》
멀리서 빈다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51》
모래
나태주
일으켜 세우려고 애쓰지 마라
본래가 먼지요 바람이었다
네가 그러했고 네가
심히 사랑했던 자가 그러했다
일으켜 세워보았자 인간의 집이고
다리이고 고작해야 돌탑
언젠가는 그것도 무너진다
무너져 먼지가 되고 바람이 되고
그래도 남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래
너 자신이요
네가 사랑했던 자의 진신사리
통곡하지 마라
통곡하지 말고 모래 한 줌
쥐어다가 가슴에 안아 보라
철철철 넘치도록 안아보아라
☆★☆★☆★☆★☆★☆★☆★☆★☆★☆★☆★☆★
《52》
몸
나태주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 주고
매만져 준다
당분간은 내가 신세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밤이면 침대에 반듯이 눕혀
재워도 주고
낮이면 그럴 듯한 옷으로
치장해 주기도 하고
더러는 병원이나 술집에도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인 줄 알았지
살다보니 그만 전셋집으로 바뀌더니
전세 돈이 자꾸만 오르는 거야
견디다 못해 전세 돈 빼어
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
모아둔 돈은 줄어들고
방세는 점점 오르고
그러나 어쩌겠나
당분간은 내가 신세져야 할
나의 집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고 닦아준다
☆★☆★☆★☆★☆★☆★☆★☆★☆★☆★☆★☆★
《53》
무인도
나태주
바다에 가서 며칠
섬을 보고 왔더니
아내가 섬이 되어 있었다
섬 가운데서도
무인도가 되어 있었다
☆★☆★☆★☆★☆★☆★☆★☆★☆★☆★☆★☆★
《54》
물끄러미
나태주
흰 구름이 자꾸만
키를 높여가는
하늘 아래
염소 한 마리 고삐 매여
풀을 뜯고 있는
풀밭 위에
살그머니 다가가
몸을 눕혀본다
마음도 눕혀본다
나는 흰 구름을 바라보는데
염소는 풀을 뜯다 말고
나를 바라본다
물끄러미
서로.
☆★☆★☆★☆★☆★☆★☆★☆★☆★☆★☆★☆★
《55》
바다에서 오는 버스
나태주
아침에
산너머서 오는 버스
비린내 난다
물어보나마나 바닷가
마을에서 오는 버스다
바다 냄새 가득 싣고 오는 버스
부푼 바다 물빛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
풍선처럼 싣고 오는 버스
저녁때
산너머로 가는 버스
땀 냄새 난다
물어보나마나 바닷가
마을로 가는 버스다
하루종일 장터에 나가
지친 아주머니 할머니들
두런두런 낮은 말소리 싣고
지는 해 붉은 노을 속으로
돌아가는 버스다.
☆★☆★☆★☆★☆★☆★☆★☆★☆★☆★☆★☆★
《56》
바람이 붑니다
나태주
바람이 붑니다
창문이 덜컹댑니다
어느 먼 땅에서 누군가 또
나를 생각하나 봅니다
바람이 붑니다
낙엽이 굴러갑니다
어느 먼 별에서 누군가 또
나를 슬퍼하나 봅니다
춥다는 것은 내가 아직도
숨쉬고 있다는 증거
외롭다는 것은 앞으로도 내가
혼자가 아닐거라는 약속
바람이 붑니다
창문에 불이 켜집니다
어느 먼 하늘 밖에서 누군가 한 사람
나를 위해 기도를 챙기고 있나 봅니다.
☆★☆★☆★☆★☆★☆★☆★☆★☆★☆★☆★☆★
《57》
부탁
나태주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
사랑아
모습 보이는 곳
까지만
목소리 들리는 곳
까지만 가거라.
돌아올 길
잊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
《58》
부탁이야
나태주
오래가 아니야 조금
많이가 아니야 조금
네 앞에서 잠시
앉아 있고 싶어
나는 왜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금방 보고 헤어졌는데도
보고 싶은 네 얼굴
금방 듣고 돌아섰는데도
듣고 싶은 네 목소리
어둔 하늘 혼자서 반짝이는 나는 별
외론 산길에 혼자서 가는 나는 바람
웃는 네 얼굴 조금만 보고
예쁜 목소리 조금만 듣고
이내 나는 떠나갈 거야
그렇게 해줘 부탁이야
☆★☆★☆★☆★☆★☆★☆★☆★☆★☆★☆★☆★
《59》
붓꽃
나태주
슬픔의 길은
명주실 가닥처럼이나
가늘고 길다
때로 산을 넘고
강을 따라가지만
슬픔의 손은
유리잔처럼이나
차고도 맑다
자주 풀숲에서 서성이고
강물 속으로 몸을 풀지만
슬픔에 손목 잡혀 멀리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온 그대
오늘은 문득 하늘
쪽빛 입술 붓꽃 되어
떨고 있음을 본다.
☆★☆★☆★☆★☆★☆★☆★☆★☆★☆★☆★☆★
《60》
비에 젖은 풀잎을
나태주
비에 젖은 풀잎을 밟고 오시는 당신의 맨발
빗소리와 빗소리 사이를 빠져나가는 당신의 나신
종아리에 핏빛 여린 생채기 진다.
가슴팍에 예쁜 핏빛 무늬가 선다.
☆★☆★☆★☆★☆★☆★☆★☆★☆★☆★☆★☆★
《61》
뿌리의 힘
나태주
쓰러진 꽃도
함부로 밟거나
잘라서는 안 된다
꽃이 필 때까지
꽃이 질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뿌리는 얼마나 애를 쓰고
줄기와 아파리는 또
얼마나 울고 불며
매달리고 달래며
그랬을 것이냐
우리는 비록 몰라도
아주는 모른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
《62》
사는 일이란
나태주
아,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잘 보냈구나
저녁 어스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다시
너를 생각한다
오늘도 잘 냈겠지
생각만으로도 내 가슴은
꽃밭이 되고 너는 제일로
곱고도 예쁜 꽃으로 피어난다
저녁노을이
자전거 바퀴 살에 휘어 감기며
지친 바람이 어깨를 스쳐도
나는 여전히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꿈을 꾸고 내일을
발돋움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 내일도 부디 잘 지내기를
아무 일 없기를
어두워 오는 하늘에도
길가의 나무와 풀에게도
빌어본다
사는 일이란 이렇게얹나
애달프고 가엾은 것이란다.
틀렸다
☆★☆★☆★☆★☆★☆★☆★☆★☆★☆★☆★☆★
《63》
사라져 가는 기찻길 위에
나태주
사라져 가는
기찻길 위에
내가 있습니다
사라져 가는
하늘 길 위에
그대 있습니다
멀리 있어서
정다운 이여,
사라짐으로 우리는
비로소 아름답고
떠나감으로 우리는
비로소 참답습니다.
☆★☆★☆★☆★☆★☆★☆★☆★☆★☆★☆★☆★
《64》
사람이 그리운 밤
나태주
사람이
사람이
그리운 밤엔
편지를 쓰자
멀리 있어서
그리운 사람
익혀졌기에
새로운 사람
하늘엔 작은 별이
빛나고
가슴속엔 조그만 사랑이
반짝이누나
사람이
사람이
그리운 밤엔
촛불을 밝히자
☆★☆★☆★☆★☆★☆★☆★☆★☆★☆★☆★☆★
《65》
사랑에 답함
나태주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
《66》
사랑에의 권유
나태주
사랑 때문에 다만
사랑하는 일 때문에
울어본 적 있으신지요?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오직
한 사람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을 꼬박 세워본 적 있으신지요?
그것이 철없음이라도 좋겠고
어리석음이라도 좋겠고
서툰 인생이라 해도 충분히 좋겠습니다.
한 사람의 여자를 위해
한 사람의 남자를 위하여 다시금
떨리는 손으로 길고 긴 편지를
써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지요?
부디 잊지 마시기 바래요.
한 사람의 일로 밤을 새우고
오직 그 일로 해서 지구가
다 무너질 것만 같았던 날들이
분명 우리에게 있었음을
그리하여 우리가 한때 나마
지상에서 행복하고 슬프고도
외로운 사람이었음을
부디 후회하지 마시기 바래요.
☆★☆★☆★☆★☆★☆★☆★☆★☆★☆★☆★☆★
《67》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나태주
서툴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어제 보고 오늘 보아도
서툴고 새로운 너의 얼굴
낯설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금방 듣고 또 들어도
낯설고 새로운 너의 목소리
어디서 이 사람을 보았던가
이 목소리 들었던가
서툰 것만이 사랑이다
낯선 것만이 사랑이다
오늘도 너는 내 앞에서
다시 한번 태어나고
오늘도 나는 네 앞에서
다시 한번 죽는다
☆★☆★☆★☆★☆★☆★☆★☆★☆★☆★☆★☆★
《68》
사랑이 올 때
나태주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자주 그의 눈빛을 느끼고
아주 멀리 헤어져 있을 때
그의 숨소리까지 듣게 된다면
분명히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심하지 말아라
부끄러워 숨기지 말아라
사랑은 바로 그렇게 오는 것이다
고개 돌리고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
《69》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나태주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그리워 하며 산다.
알지 못한 꽃밭,
꽃밭의 예쁜 꽃들을
꿈꾸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려지는 일이겠니
☆★☆★☆★☆★☆★☆★☆★☆★☆★☆★☆★☆★
《70》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나태주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
《71》
산벚꽃나무
나태주
뒤로 물러서려다가
기우뚱
벼랑 위에 까치발
재겨 딛고
어렵사리 산벚꽃나무
몸을 열었다
알몸에 연분홍빛
홑치마 저고리 차림
바람에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
《72》
산수유 꽃 진자리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 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 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 꽃 진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출처 :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중에서
☆★☆★☆★☆★☆★☆★☆★☆★☆★☆★☆★☆★
《73》
산행
나태주
마음을 비우고 몸을 비우고
당신을 찾아가는 날에 관음보살님,
석련을 꺾어 드신 손이 이쁘고
벗은 발이 이쁘고 이뻐서
혼자만 슬프신 관음보살님,
당신은 벌써 비자나무 숲길에
한 마리 다람쥐 되어 나를 반기고 계셨습니다.
시냇물 되어 도글도글
조약돌을 굴리고 계셨습니다.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비우고
당신을 찾아가던 날에 관음보살님,
당신은 이미 징검다리 돌길을 건너는
갈래머리 산처녀, 산처녀 되어
나의 앞길을 먼저 가고 계셨습니다.
☆★☆★☆★☆★☆★☆★☆★☆★☆★☆★☆★☆★
《74》
살아갈 이유
나태주
너를 생각하면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다
힘이 솟는다
너를 생각하면 세상 살
용기가 생기고
하늘이 더욱 파랗게 보인다
너의 얼굴을 떠올리면
나의 가슴은 따뜻해지고
너의 목소리 떠올리면
나의 가슴은 즐거워진다
그래, 눈 한 번 질끈 감고
하나님께 죄 한 번 짓자!
이것이 이 봄에 또 살아갈 이유다.
☆★☆★☆★☆★☆★☆★☆★☆★☆★☆★☆★☆★
《75》
새로운 길
나태주
나는 신문을 한 1년쯤
묵혔다 읽는다
어떤 때는 2, 3년, 더한 때는
10년이 지난 신문을 읽을 때도 있다
그렇게 읽어도 새로운 소식을
담은 신문이 내게는 정말로
신문이 될 수 있기 때문
나는 남들이 새로운 길이라고 소리치며
달려가는 길은 가지 아니한다
오히려 사람들이 왁자지껄 그 길을
걸어서 멀리 사라진 뒤
그 길이 사람들한테 잊혀질 만큼 되었을 때
그 길을 찾아가 본다
그런 뒤에도 그 길이 나에게
새로운 길일 수 있다면 정말로
새로운 길일 수 있기 때문
나에게 새로운 길은 언제나
누군가에게서 버림받은
풀덤불에 묻힌 낡은 길이다.
☆★☆★☆★☆★☆★☆★☆★☆★☆★☆★☆★☆★
《76》
새벽 이슬
나태주
새벽 이슬과 새들이 와서
만들어 놓은 고요
댓돌 위에
우물터에
그리고 돌계단 위에
서리서리 또아리뱀들처럼
앉혀놓은 고요
그 누가 깨트릴 수 있으랴.
풍경소리도 깨트리지 못하여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낙엽들만이
한 잎 한 잎
고요를 보탤 뿐이다
나 또한
고요를 보태는
한 잎일 뿐이다.
☆★☆★☆★☆★☆★☆★☆★☆★☆★☆★☆★☆★
《77》
새해 인사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 예순 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를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 다시 삼백 예순 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라시겠습니까?
출처 : 시집 《끝까지 남겨두는 그 마음》중에서
☆★☆★☆★☆★☆★☆★☆★☆★☆★☆★☆★☆★
《78》
석류꽃
나태주
이 꽃은
예로부터 고요하고 아름다운 동방의 나라
아침 이슬 냄새가 묻어나는 꽃.
이 꽃은
이 땅에 대대로 생겨나서
발뒤꿈치가 달걀처럼 이쁜 새댁들의
웃음소리가 들어 있는 꽃.
허물어진 돌덤불 가에 장독대 옆에
하늘 나라의 촛불인 양 피어 선연히
그 며느리들을 대대로 내려가며
투기하는 이 땅의 시어머니들의
한숨 소리도 들어 있는 꽃.
앞으로도 이 땅에서
끊이지 않고 생겨나서
발뒤꿈치가 달걀처럼 이쁠 새댁들의
웃음소리가 연이어 들어 있을 꽃.
연이어 들어 있을 꽃.
☆★☆★☆★☆★☆★☆★☆★☆★☆★☆★☆★☆★
《79》
석류나무 그늘에서
나태주
행여 내 마음속에도
소 물 먹이는 마음과
공금횡령하는 마음과
남보다 잘 살아 보겠다고 거짓말하는 마음과
나만 배부르고 편하면 그만이다 싶은
무사안일의 편협함과
남보다 좀 높이 되어 거들먹거려 보고 싶어하는
마음들이
숨어 있나 없나
가끔은 눈여겨볼 일이로다.
눈여겨볼 일이로다.
석류나무 그늘에 와서
잠시나마 깨끗하고 붉은 그 석류꽃의 빛깔이기를
나는 마음해 보며
그리하여 드디어
하늘 나라의 촛불인 양 타오르는 석류꽃 앞에서
부끄러워할 일이로다.
부끄러워할 일이로다.
☆★☆★☆★☆★☆★☆★☆★☆★☆★☆★☆★☆★
《80》
선물
나태주
나에게 이 세상은 하루 하루가 선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밝은 햇빛이며 새소리,
맑은 바람이 우선 선물입니다
문득 푸르른 산 하나 마주했다면 그것도 선물이고
서럽게 서럽게 뱀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강물을 보았다면 그 또한 선물입니다
한낮의 햇살 받아 손바닥 뒤집는
잎사귀 넓은 키 큰 나무들도 선물이고
길 가다 발 밑에 깔린 이름 없어 가여운
풀꽃들 하나 하나도 선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지구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지구에 와서 만난 당신,
당신이 우선적으로 가장 좋으신 선물입니다
저녁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진다 해도 부디
마음 아파하거나 너무 섭하게 생각지 마서요
나도 또한 이제는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
《81》
섬에서
나태주
그대, 오늘
볼 때마다 새롭고
만날 때마다 반갑고
생각날 때마다 사랑스런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풍경이 그러하듯
풀잎이 그렇고
나무가 그러하듯이.
☆★☆★☆★☆★☆★☆★☆★☆★☆★☆★☆★☆★
《82》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
나태주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
그리고 억울해서
세상의 반대쪽으로 돌아앉고 싶은 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리기라도 하고 싶은 날
내게 있었소
아무한테서도 잊혀지고 싶은 날
그리하여 소리내어 울고 싶은 날
참 내게는 많이 있었소
☆★☆★☆★☆★☆★☆★☆★☆★☆★☆★☆★☆★
《83》
수선화
나태주
언 땅의 꽃밭을 파다가 문득
수선화 뿌리를 보고 놀란다.
어찌 수선화, 너희에게는 언 땅 속이
고대광실 등 뜨신 안방이었드란 말이냐!
하얗게 살아 서릿발이 엉켜 있는 실뿌리며
붓끝으로 뽀족이 내민 예쁜 촉.
봄을 우리가 만드는 줄 알았더니
역시 우리의 봄은 너희가 만드는 봄이었구나.
우리의 봄은 너희에게서 빌려온 봄이었구나.
☆★☆★☆★☆★☆★☆★☆★☆★☆★☆★☆★☆★
《84》
숲
나태주
비 개인 아침 숲에 들면
가슴을 후벼내는
비의 살내음.
숲의 샅내음.
천 갈래 만 갈래 산새들은 비단 색실을 푸오.
햇빛보다 더 밝고 정겨운 그늘에
시냇물은 찌글찌글 벌레들인 양 소색이오.
비 개인 아침 숲 속에 들면
아, 눈물 비린내. 눈물 비린내.
나를 찾아오다가 어디만큼 너는
다리 아파 주저앉아 울고 있는가
☆★☆★☆★☆★☆★☆★☆★☆★☆★☆★☆★☆★
《85》
시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 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
《86》
시장길·1
나태주
고깃간의 육절기 앞에서
나는 겁이 난다
고기를 맵시 있게 잘도 썰어 나가는
최신식 육절기 앞에서 나는
오금이 저린다
잘려나가는 것은 돼지고기 쇠고기지만
내 팔이 잘리고 내 허벅지가 잘리는 것만 같아
오싹오싹 소름이 끼친다
우리가 이렇게 짐승의 고기를 썰어먹은 죄로
저승에 가서는 우리 고기를 대신으로
썰어 바치라는 세상 있으면 어쩔까
우리가 죽어 다시 태어나는 별에는
소나 돼지가 주인이 되고
우리가 그들의 짐승이 되는 지경이면
우리는 무슨 꼴이 될까
생각만 해도 지레
겁이 난다.
☆★☆★☆★☆★☆★☆★☆★☆★☆★☆★☆★☆★
《87》
신문
나태주
눈을 뜨면
핏발이 서고
혈압이 올라
눈을 감으니
답답하고 숨이 차서
그 또한 못 견디겠으니
낸들 어쩌겠소.
☆★☆★☆★☆★☆★☆★☆★☆★☆★☆★☆★☆★
《88》
실패한 당신을 위하여
나태주
화가 나시나요
오늘화가 실패한 것 같아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시나요
그럴 수도 있지요
때로는 자기 자신이 밉고
싫어질 때도 있지요
그렇지만 너무 많이는
그러지 마시길 바라요
자기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끝까지는 미워하지 마시길 바라요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
당신 탓만은 아니에요
세상일이란 인간의 일이란
그 무엇 하나도 저절로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당신도 잘 아시잖아요
여러 가지 일들이 서로 만나고
엉켜서 그리된 거예요
실패한 날 화가 나더라도
내일까지는 아니에요
밤으로 쳐서 열두 시까지만
그렇게 하시길 바라요
내일은 새로운 날 새로 태어나는 날
내일은 당신도 새로운 사람이고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에요
부디 그걸 잊지 마시길 바라요
내일 우리 웃는 얼굴로 만나요
☆★☆★☆★☆★☆★☆★☆★☆★☆★☆★☆★☆★
《89》
쓸쓸한 여름
나태주
챙이 넓은 여름 모자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빛깔이 새하얀 걸로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올해도 오동꽃은 피었다 지고
개구리 울음 소리 땅 속으로 다 자즈러들고
그대 만나지도 못한 채
또다시 여름은 와서
나만 혼자 집을 지키고 있소
집을 지키며 앓고 있소.
☆★☆★☆★☆★☆★☆★☆★☆★☆★☆★☆★☆★
《90》
씁쓸한 삶의 향기
나태주
비린내나는
젊은 시절엔
모르리
맹물맛 뒤에 숨어나는
씁쓰레한
삶의 향기
혼자라도 좋고
둘이라면 더욱
좋으리
갈 사람 가고
올 사람 온
하오의 한때
마른 입술 적셔주는
화사한
고독
차라리
색동옷 입혀
마주 앉히리
눈보라 스러지는
봄의 언덕 푸르름 속에
새로 움트는 안단테 아다지오
드디어 청산도
아는 체하고 흰 구름도
같이 와 놀자 하네.
☆★☆★☆★☆★☆★☆★☆★☆★☆★☆★☆★☆★
《91》
아끼지 마세요
나태주
좋은 것 아끼지 마세요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옷 예쁜 옷
잔칫날 간다고 결혼식장 간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철 지나면 헌옷 되지요
마음 또한 아끼지 마세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스런 마음 그리운 마음
정말로 좋은 사람 생기면 준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노인이 되지요
좋은 옷 있으면 생각날 때 입고
좋은 음식 있으면 먹고 싶은 때 먹고
좋은 음악 있으면 듣고 싶은 때 들으세요
더구나 좋은 사람 있으면
마음 속에 숨겨두지 말고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그리하여 때로는 얼굴 붉힐 일
눈물 글썽일 일 있다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지금도 그대 앞에 꽃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 꽃을 마음껏 좋아하고
그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
《92》
아름다운 사람
나태주
아름다운 사람
눈을 둘 곳이 없다
바라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니 바라볼 수도 없고
그저 눈이
부시기만 한 사람
☆★☆★☆★☆★☆★☆★☆★☆★☆★☆★☆★☆★
《93》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태주
아무 것도 모르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부비며 우는 철부지
어린아이이고 싶다.
사람의 냄새와
사람의 껍질을 벗고서도
또 사람이고 싶다.
작은 바람에도 살아 쓸리는 여린 풀잎,
미세한 슬픔에도 상처받아 우는 작은 별빛,
드디어 나는 나만 아는
차고 맑고 그윽한 향기를 머금고 싶다.
☆★☆★☆★☆★☆★☆★☆★☆★☆★☆★☆★☆★
《94》
아카시아 꽃
나태주
쑥죽 먹고 짜는
남의 집 삯베의
울어머니 어질머리.
토담집 골방의
숯불 화로 어질머리.
수저로 건져도 건져도 쌀알은 없어
뻐꾸기 울음소리 핑그르르 빠지던
때깔만은 고운 사기대접에
퍼어런 쑤죽물.
꽃이라도 벼랑에
근심으로 허리 휘는
하이얀 아카시아꽃 피었네.
☆★☆★☆★☆★☆★☆★☆★☆★☆★☆★☆★☆★
《95》
안부
나태주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
《96》
안쓰러움
나태주
오늘 새벽에 아내가 내 방으로 와
이불 없이 자고 있는 나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새우처럼 구부리고 자고 있는 내가
많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잠결에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어젯밤에는 문득 아내 방으로 가
잠든 아내의 발가락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돌아왔다
노리끼리한 발바닥 끝에 올망졸망 매달려있는
작달막한 발가락들이 많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내도 자면서 내 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다른 방을 쓰고 있다
☆★☆★☆★☆★☆★☆★☆★☆★☆★☆★☆★☆★
《97》
어리석음
나태주
이천 년도 훨씬 전에 예수님
너무 쉽게, 알아듣기 쉽게 하신 말씀
감사하면서 살아라
기뻐하면서 살아라
용서하면서 살아라
그 말씀 너무 쉬워서
이천 년을 두고 저희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
《98》
어쩌다 이렇게
나태주
있는 듯 없는 듯
있다 가고 싶었는데
아는 듯 모르는 듯
잊혀지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대 가슴에 못을 치고
나의 가슴에 흉터를 남기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나의 고집과 옹졸
나의 고뇌와 슬픔
나의 고독과 독선
그것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과연 좋은 것이던가
사는 듯 마는 듯 살다 가고 싶었는데
웃는 듯 마는 듯 웃다 가고 싶었는데
그대 가슴에 자국을 남기고
나의 가슴에 후회를 남기고
모난 돌처럼 모난 돌처럼
혼자서 쓸쓸히.
☆★☆★☆★☆★☆★☆★☆★☆★☆★☆★☆★☆★
《99》
여행에의 소망
나태주
그곳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네가 그리운 것이다
그곳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네가 보고 싶은 것이다
너는 하나의 장소이고 시간
빛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나라
네가 있는 그곳이 아름답다
네가 있는 그곳에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그곳에 가서 나도
그곳과 하나가 되고 싶다
☆★☆★☆★☆★☆★☆★☆★☆★☆★☆★☆★☆★
《100》
오늘의 과업
나태주
오늘도 햇빛은 나를 사랑해
나의 눈꺼풀에 머물러 잠을 깨웠고
바람은 나를 찾아와
목덜미를 쓸어주고 있으며
나 심심하지 말라고 뜨락에 붉은 꽃 피고
새들은 또 가끔 내 귀를 간질여준다
보아라!
하늘의 구름이 갈 길을 멈추고
그대를 생각하며 가슴에 품으며 그대를
이윽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오늘 누구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 알 것인가?
주어야 할 그 무엇이 있는가?
☆★☆★☆★☆★☆★☆★☆★☆★☆★☆★☆★☆★
《101》
외로운 사람
나태주
전화 걸때마다
꼬박꼬박 전화를 받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불러주는 사람 별로 없고
세상과의 약속도 별로 많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니까요
전화 걸때마다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은
더욱 외로운 사람입니다.
아예 전화기가 멀리 떨어져
새 소리나 바람소리.
물소리 길을 따라가며
흰 구름이나 바라보고 있는
그런 사람이 분명할 테니까요
☆★☆★☆★☆★☆★☆★☆★☆★☆★☆★☆★☆★
관련링크
댓글목록
정민기09님의 댓글

"가보지 못한 골목길을" 걸어가는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