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이미지원본보기

세계 곳곳에서 수여되고 있는 수많은 문학상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상금이 많은(10억여원) 노벨문학상이 미국 포크 가수 밥 딜런(75)에게 돌아갔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T. S. 엘리엇,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등 기라성 같은 시인-소설가들이 받은 상이자,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같은 세계 문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문호들도 못 받은 상이 노벨문학상이다.
 
대중음악 가수가 이 상을 받은 것은 1901년 첫 수상자를 낸 이후 115년 만에 처음이다. 그동안 수상자 중에는 앙리 베르그송,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수상 거부) 등 철학자들이 있었고, 윈스턴 처칠 같은 정치인도 있었지만 이들 모두 최고 수준의 라이터(writer)들이었다.
 
필자는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마치 스티브 잡스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만큼 어이가 없는 난센스라고 본다. 노벨문학상을 시상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詩的) 표현을 창조해왔다”고 시상 이유를 밝혔는데, 필자에게 그런 내용은 그래미상 시상 이유처럼 들린다.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within the great American song tradition)”이라는 구절이 도대체 문학상과 무슨 관련이 있단 얘긴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터무니없다(absurd)’고 보는 이유는 4가지다.
 
첫째, 문학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온전히 언어(문자)의 구축(構築)으로 이뤄진다.

시-소설 같은 문학작품이 위대해 질 수 있는 건 그것이 순전히 언어로만 직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노벨문학상에 대해 일부에서 “문학의 경계를 넓힌 듯하다”는 엉뚱한 소리도 나오던데, 이는 문학의 경계 확장이 아니라 문학의 ‘존재 기반 포기’에 해당한다. 사라 다니우스 한림원 사무총장도 이를 의식했는지 “한림원이 이번 결정으로 비난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여러 논란을 의식한 다니우스 사무총장은 또 “5000년 전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와 사포는 노래로 불릴 것을 의도하고 시적인 텍스트를 썼는데, 밥 딜런도 똑같은 길을 걸었다”고 부연설명을 했다. 하지만 이는 상식 밖의 발언이다.
 
서양 문학 최초의 걸작으로 꼽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기원전 8세기경에 구전(口傳)으로 성립되고, 기원전 6세기 쯤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추정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한림원 주장처럼 “노래로 불릴 것을 의도하고” 만든 게 아니라, 애초부터 효과적인 암송과 구전을 위해 노래처럼 운율을 맞춘 작품인 것이다.
 
‘노래(song)’는 리듬과 멜로디로 이뤄진 ‘곡(曲, music)’이 우선인 장르다. 영어로 ‘작곡(作曲)’이, ‘작문(作文)’을 뜻하는 ‘composition’임을 유의해야 한다. ‘작사(作詞)’는 영어로 ‘lyric’인데 이 단어는 원래 ‘수금(lyre)의 반주로 노래하는’에서 유래했다. 다시 말해 노래에서 가사는 절대로 곡에 우선할 수도, 곡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도 없다.

딜런을 통상 ‘음유시인(minstrel)’이라 일컫던데, 음유시인과 ‘시인(poet)’은 엄연히 다르다. ‘minstrel’은 중세의 음악가를 일컫는 말이다. 즉, 음유시인의 방점은 시인이 아닌 음악이다.
 
둘째, 위대한 문학은, 뭉뚱그려 말하자면, 인간 또는 세계(사회)에 대한 통찰을 담는다.

그런데, 딜런이 쓴 가사에 인간 또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나 시각이 있는가? 노벨상 한림원도 이를 의식했는지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Knocking’on Heaven’s Door)’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in the Wind)’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리 대단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느낌을 우리는 받을 수 없다.

본문이미지원본보기

셋째, 대중가수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고급한 문학작품을 고대하고 있는 전 세계 문학 독자들에 대한 ‘우롱’이다.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듣고 <채식주의자>를 찾아 서점으로 달려가던 문학 독자들은
이제 유튜브나 들여다 보라는 얘긴가.
 
그동안 노벨문학상은 조지 버나드 쇼, 새뮤얼 베케트, 다리오 포 같은 희곡작가들에게도 수상의 영광을 안겨왔다.
희곡은 무대 공연을 전제로 한 각본이지만, 주지하다시피 순전히 읽히기 위한 작품으로도 사랑받아 왔다.
하지만, 노래 가사는 곡과 어울릴 때에만 그 가사의 울림이 제대로 전달된다는 속성이 있다. 
 
넷째, 이런저런 복잡한 논의를 차치하더라도 밥 딜런의 가사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수준이 아니다.

위에 언급한 두 노래의 가사를 가만히 읽어보시라. 웬만한 문학작품을 읽은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수준의 글일 뿐이다.

심지어 팝 음악계에는 폴 매카트니(비틀스), 폴 사이먼(사이먼 앤 가펑클), 레너드 코헨 등 딜런의 가사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와 울림 가득한 정서를 품은 가사를 써낸 백전노장들이 허다하다.
 
필자의 눈에는, 이번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선정’이 뉴스성이 떨어지게 된 현실에서
스웨덴 한림원이 ‘흥행’을 염두에 두고 무리수를 둔 것으로 여겨진다. 번역가인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 또한 “코미디처럼 느껴진다. 문학이라는 큰 배가 타이타닉호가 돼가는 것 같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실제 2010년 이후 노벨문학상 수장자의 면면만 봐도 이를 단번에 알 수 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페루 소설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스웨덴 시인), 모옌[莫言](중국 소설가), 앨리스 먼로(캐나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프랑스 소설가)...
조앤 K 롤링이나 무라카미 하루키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듣도 보도 못한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을 받아 온 것이다.
 
딜런의 수상에 대해, 영화로도 만들어진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의 영국 작가 어빈 웰시(Irvine Welsh)는 “내가 딜런의 팬이기는 하지만, 이번 수상은 노망나 횡설수설하는 히피의 썩은 전립선에서 짜낸 노스탤지어에 주는 상(this is an ill-conceived nostalgia award wrenched from the rancid prostates of senile, gibbering hippies)”이라며 신랄하게 비꼬았다.
 
영국 작가 하리 쿤즈루도 “오바마에게 ‘부시와 다르다’는 이유로 노벨평화상을 준 이래 가장 설득력 없는 노벨상 수상(the lamest Nobel win)”이라고, 미국 작가 제이슨 핀터는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으면, 스티븐 킹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라야 한다”고 비판했다.
 
아무 근거는 없지만, 필자는 전 세계 재계와 언론계를 꽉 잡고 있는 유대인들의 입김이 이번 노벨문학상 선정에도 작용했다고 본다. 밥 딜런은 본명이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Allen Zimmerman)인 유대인이다. 공교롭게도 뉴욕타임스의 딜런 수상 기사에는 비판적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알프레드 노벨은 노벨문학상이 “문학 분야에서 이상적 방향으로 가장 탁월한 작품을 쓴 이(the person who shall have produced in the field of literature the most outstanding work in an ideal direction)”에게 수여돼야 한다고 유언으로 남겼다.
 
하지만, 18명의 노벨문학상 선정위원들은 상의 본래 취지를 무색케 하는 결정을 이번에 내렸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는 시나리오 작가, ‘미드’ ‘일드’ 드라마 작가에게도 노벨문학상을 줄 판이다. 
 
이번 해프닝으로, 노벨문학상의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했음은 물론, 그와 더불어 안 그래도 얼만 남지 않은 문학 영토의 하늘에 귀청이 떨어져라 댕댕 조종(弔鐘)이 울리고 있는 것이다.


 
[글=신용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