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글] “믿습니까?” 물으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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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희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063회 작성일 17-04-21 17:01본문
종교도 없는 처지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외람되지만..
아무튼, 이 시대에 종교가 비지니스(Business)가 된 건
명약관하(明若觀火)한 거 같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오늘 날 인간들에 의해 行해지는 종교사업의 모습을 본다면
' 이건 아니지' 하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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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종교개혁 본질은 ‘저항’인데 요즘 교회, 순종을 믿음과 동일화
‘오직 믿음, 오직 성서’의 메시지
특권과 배타적 의식으로 왜곡도
종교·제도·먹고사는 문제에 매인 노예의 삶 벗어나는 게 부활의 길
그는 인터뷰 서두에 단어 하나를 꺼냈다.
- 질의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
- 응답 :“자기가 믿는 종교 전통에 대한 저항이다.
- 불합리한 국가적 권위와 제도적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다.
- 그리고 개인의 신앙 양식에 대한 저항이다.”
- 질의 :왜 그렇게 저항해야 하나.
- 응답 :“루터의 신앙은 한 마디로 ‘저항’이었다. 그건 본질과 근원을 향하는 저항이었다.
- 그럼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어떨까. ‘저항’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렸다.
- 교회에는 그 자리에 다른 단어들이 들어서 있다.”
- 질의 :‘저항’의 자리에 들어선 건 어떤 단어들인가.
- 응답 :“순종이니, 복종이니 하는 말이다. 교회는 이런 말들을 ‘믿음’과 동일화시킨다.
- ‘순종=믿음’이고, ‘복종=믿음’이다. 그래서 종교에 대한 저항, 국가에 대한 저항,
- 개인적 삶의 양식에 대한 저항이 상실돼 버렸다.
- 500년 전 종교개혁의 핵심 키워드는 ‘저항’이었는데 말이다.
- 단순히 저항만을 위한 편협한 저항을 말하는 게 아니다.
- 예수로 돌아가고,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저항이다.”
중세의 유럽은 종교사회였다. 평민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글도 몰랐다.
이에 루터는 반기를 들었다. 이 원장은 그 이유도 설명했다.
- 질의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가.
- 응답 :“시간이 흐르면서 루터에 대한 온갖 교리가 생겨났다.
- 지금은 그런 교리를 따르고 신봉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기는 풍토가 만연하다.
- ‘믿습니까?’ 물으면 ‘아멘!’하면 되는 식이다.
- 안타깝게도 루터가 무너뜨리고자 했던 중세의 박제화된 신앙으로 우리는 돌아가고 있다.
- 이런 방식의 신앙 구조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 질의 :어떤 문제를 야기하나.
- 응답 :“우리는 기독교가 로마를 기독교화한 걸로 알고 있다. 그게 아니다.
-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화한 거다. 그게 기독교 첫 1000년의 역사였다.
- 루터는 그걸 뛰어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비로소 ‘근대’와 ‘자본주의’라는
- 새로운 가치가 태동했다. 개신교 안에서 태어난 게 자본주의였다.
-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자본주의가 개신교를 철저히 자본주의화시키고 말았다.
- 이 시대는 다시 ‘루터’를 뛰어넘기를 요구한다.”
이 원장은 영국 BBC에서 발표했던 국가별 욕망지수(2008년)를 예로 들었다.
- 질의 :내로라하는 대형 교회도 세습 강행을 서슴지 않는다. 왜 그런가.
- 응답 :“교회 안의 기득권 세력들이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담임목사만 세습되는 게 아니라 기득권 그룹까지 살아남게 된다.
- 북한 사회도 마찬가지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내려오는 3대 세습뿐만 아니라
- 북한 사회의 기득권층도 동시에 세습이 이루어지는 거다.”
- 질의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는 종교개혁의 3대 원리다.
- 이건 욕망을 내려놓을 때 가능한 것 아닌가.
- 응답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는 물질적 축복과 신의 은총을 동일시한다.
- 자본주의 세계에서 승리자가 되라고 한다. 교회가 크면 목사도 떵떵거리고 산다.
- 그런데 교회가 작으면 목사가 2중직, 3중직을 해야 한다.
- 퀵서비스도 뛰고, 야간 대리운전을 하는 목사도 꽤 있다.
- 작은 교회의 목사에게 그건 삶의 실존이다.
- 개신교 교회는 ‘빈익빈, 부익부’라는 자본주의 양식이 그대로 작동한다.
- 중앙집권적 체제인 가톨릭이나 원불교에는 큰 교회(교당)와 작은 교회(교당)간 분배의 양식이 있다.
- 개신교에는 그게 없다.”
- 질의 :왜곡된 ‘오직’의 의미는 루터의 본래 메시지와 분명히 다르다. 왜 사람들은 그걸 보지 못하나.
- 응답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자각이 출발선이다. 그러려면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 그런데 교회는 집단적 인습에 사람들이 길들여지도록 만든다.
- 교회에 가면 내가 무엇이 잘못됐는지 돌아볼 여지가 오히려 없어져 버린다.
- 교회는 사람들을 집단화한다. 개인을 고독하게 만들지 않는다.
- 우리는 고독을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거기서 출발했다.”
- 질의 :루터의 저항 정신이 사회를 향할 때는 어찌 되나. 충돌과 불협화음만 만들지는 않나.
- 응답 :“중세의 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하이어라키(hierarchy·위계) 사회였다.
- 루터는 그걸 허물었다.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했다.
- 여기에는 어떠한 계급도 없고, 서로 하는 역할만 다를 뿐이라고 했다.
- 이러한 루터의 교회론은 유럽에서 민주적인 의회제도가 태동하는 모태가 됐다.
- 그러니 루터의 저항 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체제 밖의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 질의 :체제 밖의 사유, 예를 들면.
- 응답 :“예수님은 당시 이스라엘 실정법에 도전하신 분이다.
- 유대 율법에 ‘안식일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돼있다.
-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했다.
-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체제 안의 사유가 아니었다.”
- 질의 :그럼 무엇인가.
- 응답 :"체제 밖의 사유였다. 가령 예수는 늦게 온 자나 일찍 온 자나 똑같이 한 달란트를 줬다.
- 세상 기준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면서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 초대해 잔치를 베풀어라. 오히려 그들이 되갚을까를 염려하라’고 했다.
- 우리도 이 사회가 기정사실화하는 틀을 끊임없이 넘어서야 한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유를 가르쳐 주셨다.
- 기존의 틀, 체제 밖에 대한 상상 말이다. 나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말미에 가슴에 품고 사는 딱 하나의 성경 구절을 물었다.
마침 4월16일이 부활절이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의 부활도 없다’고 했다.
● 『역사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지음, 길) =지금까지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었다. 저자는 ‘과거를
● 『다석 강의』 (다석 유영모 지음, 현암사)=다석은 한글을 ‘천문(天文)’이라고 했다. ‘하늘의 글’이란 뜻이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단독] “믿습니까?” 물으면 “아멘!” … 이건 중세시대 박제화된 신앙
댓글목록
率兒님의 댓글
率兒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다석 유영모 선생님에 관한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직접 저술한 책이 한 권도 없습니다. 강의를 들은
제자의 기술만이 있을 뿐입니다. 한번 읽어보실만 합니다.
중동의 신화들이 유대인의 손에 들어가 유대 메시아 신앙과 결합되어
그리스도교가 되었듯이 이 초기 그리도스교가 로마에 들어가 로마화한
것이 카톨릭이지요. 사실 사도신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와 니케야 이후
정통 기독교로 자리 잡은 카톡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아마도 오
늘날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된 각종 신경들의 생성과정을 알면 아마도
어안이 벙벙해질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믿음은 결국 자기 만족인데 믿음의 기초가 된 그런 점에 대하여는 저는
아예 모르는 것이 약으로 생각됩니다. 믿으나 안 믿으나 결과는 마찬가
진데 의심하며 속 끓이고 사느니 그냥 믿쑵니다 하면서 속이라도 편하게
사는 것도 좋은 한 방편으로 생각됩니다.
이러는 사이 또 하루 해가 넘어갑니다.
안희선님의 댓글
안희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요즘 한국 사회의 종교판을 보자면.. (제도권 및 각종 사이비 종교 포함해서, 총 망라해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뮙슙니까?
- 아, 저는 아닌데요
생각할수록 제가 무종교인이라는 게 참, 은혜롭게 여겨집니다
* 권하신 다석 선생님에 관한 책은 꼭 읽어보렵니다
率兒님의 댓글
率兒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럼요. 종교직인 믿음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은
무종교인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로 생각되겠지만
어쩌면 무종교가 가장 은혜로운 삶인지도 모릅니다.
무종교도 또 하나의 믿음생활이거든요.
왜 사람들이 무종교에 회의적일까?
답: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 우주 어디에도 인격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즉 겁나니까!
안희선님의 댓글의 댓글
안희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솔아 형님의 (인간적으로) 가장, 큰 결점(?)
- 늘, 입바른 말씀만 하신다는 거
그러니까, 요즘 같은 각자 저 잘났다고 막 가는 세상에서 늘상 튀어보이고
사람들로 부터 경원(敬遠)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요주의 要注意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