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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나보다 먼저 가고 있다 / 홍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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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서피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67회 작성일 20-09-23 11:03

본문

지구가 나보다 먼저 가고 있다

​홍철기


걸을 때마다 물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내 귀에는 물이 흘러요
아, 나는 물방울이에요
따로 움직이는 몸짓은 눈에 잘 띄어서
그날 밤 짧은 다리로 뒤척이는 걸 알았어요

다르다는 이유로 일생이 흔들렸던 사람
알고 있어요 나는 지금 물처럼 걷는 연습을 하고
세상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찾고 있죠

건널목 앞에서 절룩이던 시간은 어떤 색이었을까요
오늘, 말없이 가다 마주친 사거리에서
듣지 못한 말들이 아는 척을 해요
다리가 길어지면 긴 꿈을 꿀 수 있을텐데
넘어지지 않게 붙들고 싶은 하루가 튀어나와
붙잡아 준다면 가능할까요

씩씩하게 내딛는 걸음에
내일은 물이 넘치는 소리로 가득할 거에요

늘 궁금했어요

나는 왜 지구보다 늦게 가고 있는 걸까요


ㅡ시집 <파프리카를 먹는 카프카> 2020, 시산맥


 

[감상]

건널목 앞에서 절룩이던 시간, 다리가 길어지면 빠르게 걸어가는 지구를 따라잡을 텐데, 넘어지지 않고 긴 꿈을 꿀 수 있을 텐데, 오늘도 짧은 다리로 물처럼 걷는 연습을 하는 나와, 너와, 우리의 눈빛이 문장 속에서 정처없이 흔들린다...그러나 어쩌면, 어떻게 생각보면 지구보다 늦게 걸어도 괜찮다...남들처럼 긴 다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대신 슬프도록 아름다운 지구의 등을 보며 걷고 있으니. 결핍이 시인을 만드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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