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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말을 잘하는 것과 잘 말하는 것의 차이 - 각을 잡다/ 권영옥 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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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669회 작성일 20-02-2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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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말을 잘하는 것과 잘 말하는 것의 차이



 

-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각을 잡다/ 권영옥

√히프노시스2/ 이은서

√치킨은 철새다/ 이동우

 

한 해가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삼월이다.한 해가 열 달 밖에 남지 않았다. 세월이라는 말은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말이다. 흘러간다는 것은 자연의 현상이다. 면면부절한 자연 앞에 인간의 시간은 얼마나 짧고 무량한지 하는 생각이 드는 계절이 겨울의 끝자락일 것 같다.

 

시를 쓰면서 많은 고민과 질문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또한 시라는 문학 장르는 단순히 문장을 만들고 이해하는 범주에서 벗어나 인문학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삶이라는 명제와 완전하게 일치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 속에는 삶이 있고 관계가 있고, 현상이 있고 사물을 보는 직관과 예지가 있다. 삶을 영위하면서 얻어지고 공부하며 갈등과 반목을 포함한 모든 감정을 순화하거나 첨예한 대립의 각을 뭉툭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 시를 쓰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며 시라는 것의 올바른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가장 예의 바른 자세와 생각을 갖게 만들고 그 매뉴얼을 공유할 수 있기에 공감이라는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글이다. 예의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예의는 사회생활이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을 말한다. 사회생활을 시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시가 바른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매개체라면 최소한 시를 쓸 때 예의를 갖추어야 시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시에 대한 예의는 어려울 것도 없다. 정갈해야 한다. 계산이나 목적이 없어야 한다. 물론 목적은 한 편의 시를 통해 무엇을 얻거나 취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자신이 느낀 것에 정확한 성찰이 존재한다면, 아니 존재해야 한다. 시인이라 칭하는 분들과 대화하다 보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단숨에 썼다. 하루에 두 편 썼다. 몇 년 동안 쓴 작품이 천 편이 넘는다. 등등의 말을 들을 때마다 존경스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물론. 시는 영감을 통해 얻은 예지를 글로 표현하는 것이기에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시를 쓴 작품들이 우수한 작품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몇몇 그런 말을 하시는 분들의 작품을 볼 때, 고개가 갸웃거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 두보는 최소한 시 한 편을 퇴고하는데 삼 년은 걸려야 한다고 말했다. 퇴고의 중요성도 중요성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시에 대한 예의를 말한다는 생각이 든다. 단숨에 써 내려간 작품이 좋다 , 혹은 안 좋다는 비교나 폄하가 아니다. 시 한 편에 대한 시인의 애정을 말하고 싶다.

 

시 한 편이 세상에 나와 누군가의 일상에 위로가 되고 누군가의 삶에 목표가 되고 위안의 시간을 준다면 시 한 편에 대한 나의 예의는 과연 적절한지 진중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간혹 주변에 문학상이란 상은 모두 도전하는 분들을 자주 본다. 문학상에 도전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며 자신의 시를 발전하는데 긍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한 객관적인 평가를 듣는 소중한 기회를 얻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부정적인 요인 또한 산적한 것도 사실이다. 문학상의 당선 기준이라는 공인되지 않는 말들에 의지하여 자신의 글이 무색무취한 일종의 방정식과 같은 글이 된다는 점이다. 문학상에 도전하면서 늘 하는 말은 빨리 내 글을 써야 하는데 라는 말이다. 어불성설이다. 문학상에 내는 글을 내 글이 아니라는 말인가? 알면서도 그렇게 내야 하는가? 한두 번 문학상에 되면 그것을 목표로 글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해마다 달마다 여기저기 문학상을 기웃거리는 것은 일종의 행태다. 행동하는 모양이 그렇게 보기 좋지는 않다. 자신의 글을 발전시킨다는 지향점은 좋다. 그것을 위해 도전하는 열정도 멋지고 훌륭한 일이다. 반면, 기우겠지만 자신의 글을 뽐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글 쓰는 기술을 뽐내려는 것은 아닌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초라한 군상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모두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또한 몇몇의 사례일 뿐이며 다만 필자의 어눌한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늘 경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한 톨이라도 나름의 계산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목표가 아닌 목표로만 남을 것이다.

 

시는 정직해야 한다. 그것이 시에 대한 예의다. 위선이나 가식, 포장 등등은 시를 위태롭게 만든다. 하이퍼라는 것으로 미래파라는 개념으로 포장하거나 가식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하이퍼가 되는 시를 쓰고 정말 미래파에 걸맞은 시를 써야 한다. 자신의 시에 대한 모호함 때문에 정작 존경 받아야 할 하이퍼, 미래파의 시가 조금이라도 폄하된다면 문단에 슬픈 일이다. 시는 감정이나 성찰에 정직해야 하지만 그 형태적인 요소, 구성적인 요소 모두 정직해야 한다. 타인의 글을 흉내 내는 것은 좋으나 표절은 부끄러운 일이다. 타인의 생각을 절도하는 것은 인생을 절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는 그 자체로 삶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번 달의 글제는 말을 잘하는 것과 잘 말하는 것의 차이라고 했다. 비슷한 말이다. 앞, 뒤의 순서만 바뀐 말일지도 모른다. 잘 생각해 보자. 말을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말을 잘한다는 것은 선천적일 수 있다.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말일 수도 있다. 상황 변화에 능동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더 확장하여 생각하면 상당한 양의 지식을 뇌 속에 축적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입력된 것이 많아야 출력할 것이 많다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인기가 높다. 하지만 어느 경우 말 잘하는 그저 말만 잘한다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말만 잘한다는 것은 말이 앞선다는 말과 같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나 지키지 못할 것에 대하여 말을 앞세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잘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생각이 드는 것은 지혜롭다는 말이다. 잘 말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말을 하기 전 깊은 생각을 하고 내가 하는 말이 과연 타인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말에서 파생되는 것은 어떤 것일지? 상처를 보듬어 주거나 설득하거나 곤경에 처한 일에 대해 힘이 되는지 등등을 살피거나 혜량 하여 잘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와 비교해 보자. 말을 잘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필자의 서툰 시선으로 위에 언급한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말을 잘한다는 것은 어쩌면 쉽게 시를 쓴다는 것과 조금은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는 감동의 언어이며 성찰의 언어라고 할 때 최소한 시에서는 말을 잘하는 것보다 잘 말을 해야 하는 것에 방점을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깊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는 사고의 산물이며 결과의 감동이다. 그저 그런 신변잡기를 쓰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아무렇게나 쓰는 글이 아니다. 시는 예술의 총화이며 상념과 번민의 총화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단 숨에 쓴 작품도 좋은 작품이다. 일 년에 천 편을 써도 좋은 품이다. 하지만 그것에 앞서. 몇 편의 편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 한 편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예의를 담았는가 하는 생각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에 대한 예의는 나의 작품에 대한 것도 있지만 다른 분의 작품을 읽을 경우에도 해당된다. 그저 그렇게 계수기에서 돈다발 넘어가듯 휙 넘어가게 읽지 말자는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위해 시인은 많은 시간을 힘들어했을 것이기에 단어 하나, 문맥 하나 모두 소중한 것이며 시인의 생명과 같은 것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쉽게 쓰거나 쉽게 읽지 말자는 것이다. 잘 말해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생각을 거듭해서 말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이라는 것을 독자는 알고 있다.

 

안도현 시인의 [감정 드러낼수록 시적 영감은 변질된다]라는 글을 일부 인용해 본다. 잘 말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공부가 될 것 같다.

 

감정 드러낼수록 시적 영감은 반감된다 / 안도현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쓴 동시 한 편을 읽어보자. 어느 어린이 글짓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동시를 쓴 아이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이런 유형의 동시를 보면 화가 난다. 한숨이 절로 쏟아진다. 이 동시를 쓴 아이 때문이 아니다. 이런 동시를 쓰게 하고, 심사를 해서 상을 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는 어른들이 한심해서다. 좀 더 과하게 말한다면 이 작품은 동시도 아니고 시도 아니다.

 

커다란 황금물감 푹 찍어

가을들판에 가만가만 뿌려놓았다

탱글탱글 누우런 벼이삭

살랑살랑 가을바람 불어오면

빠알간 고추잠자리

두둥실두둥실

흥겨운 춤사위

참새친구 멀리 이사 가도

외롭지 않은 허수아비

허허허 허수아비의 정겨운 웃음소리에

농부아저씨 어깨춤 덩실덩실

 

우리는 이 동시를 읽으며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아니, 의문을 가져야 한다). 물감을 과연 커다랗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물감을 강하게 ‘푹’ 찍었는데 왜 조심스럽게 ‘가만가만’ 뿌리는가? 그렇게 물감을 뿌리는 주체는 누구인가? 호두나 감자도 아닌 벼이삭의 생김새를 ‘탱글탱글’로 표현하는 게 맞는가? 고추잠자리의 비행이 일정한 격식을 갖춘 춤사위라고 할 수 있는가? 허수아비와 참새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참새를 쫓기 위해서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서 있어야 할 허수아비가 왜 웃는가?(실성을 했나) 농부아저씨는 추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어깨춤을 추시는가?(낮술이라도 한잔 드셨나)제목은 <가을맞이>다. 왜 그냥 <가을>이라고 하지 않고 <가을맞이>라고 했을까? 이 동시는 가을의 일반적인 풍경을 그저 평이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가을을 맞이하는 그 어떤 적극적인 자세도,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색도 없다. ‘가을’이라고 하면 맨송맨송해서 다만 무엇인가 덧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맞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면 왠지 시적인 표현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는 으레 꾸미고 몇 글자를 덧붙이는 것이라는 잘못된 의식이 시 아닌 것을 시로 행세하게 만들고 있다.

 

<형용사는 감정 직접노출 독자의 상상력 마비시켜><동사의 역동성 키워야 은유와 상징 되살아나>글을 아름답게 하려고 다듬고 꾸미고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일을 수사(修辭)라고 한다. 이 동시는 온전히 수사의 기술로 쓴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쓰인 시어 중에 명사는 모두 10개다. ‘황금물감·가을들판·고추잠자리·춤사위·참새친구·이사·허수아비·웃음소리·농부아저씨·어깨춤’이 그것이다. ‘이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교롭게도 두 개 이상의 단어가 결합한 복합어의 형태다. 이 명사들은 가을을 피상적으로 바라본 결과로서 그 스스로 빛나는 시적 영감을 던져주지 못하고 시를 위해 동원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에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포함한 부사가 ‘푹·가만가만·탱글탱글·두둥실두둥실·멀리·허허허·덩실덩실’ 등 7개이고, 색깔이나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로 ‘커다란·누우런·빠알간·흥겨운·정겨운’ 같은 말들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부사와 형용사를 빼고 이 동시를 한 번 읽어보자.“황금물감 찍어/ 가을들판에 뿌려놓았다/ 벼이삭/ 가을바람 불어오면/ 고추잠자리/ 춤사위// 참새친구 이사 가도/ 허수아비/ 허수아비의 웃음소리에/ 농부아저씨 어깨춤”이렇게만 해도 작자가 형용사를 통해 대상을 간섭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기회가 대폭 줄어든다.

 

「감정 드러낼수록 시적 영감은 반감된다/ 안도현」일부 인용

 

위 논고의 요지는 필자의 논고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잘 말하는 것에 대한, 시를 잘 쓰는 것에 대한 원 개념은 대동소이할 것이다. 정작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를 때가 종종 있다.

 

이 번 달에 소개할 세 편의 작품은 잘 말하는 것에 근거하여 선별한 작품들이다. 가장 먼저 소개할 작품은 권영옥 시인의 [각을 잡다]이다. 시쳇말로 각을 잡는다는 말이 있다. 각을 잡는다는 것은 폼을 잡는다는 말이며 동시에 어떤 행위를 하기 전, 각오를 다지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을 하기 전 옷매무새나 마음가짐을 바로 갖는 행위를 통칭하여 각을 잡는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권영옥 시인의 [각을 잡다]는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람, 시간과 시간, 이 모든 물리적인 현상이 갖고 있는 ‘각’, 다짐에 대한 형상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원인행위의 시작을 하기 직전, 바로잡아야 할 ‘각’은 구두 광택이나 금빛 체인 등의 부속물이 아닌, 마음속 마음에 대한 마음의 발현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작 중요한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 잡은 ‘각’그 각을 볼 줄 알아야 진정한 각을 잡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고 느껴진다. 각은 면과 면이 만나 이루어지는 모서리를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시적 배경에 숨어 있는 각은 覺을 의미할 수도 있다. 면과 면이 만나 이루어지는 각은 면과 면이라는 상대성을 기준으로 한다. 한 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면이 있어야 비로소 각의 모서리가 생성되는 것이라면 ‘각을 잡다’의 각은 면과 면이 아닌 면 바깥 혹은 면의 안쪽에 도사리고 있는 상대비교가 아닌 절대 비교의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면이 있음으로 각이 존재하는 비교급의 각이 아닌, 내면에 뾰족하게 돋아 나오려는 각의 의미를 각을 잡다 라는 시제로 각의 외연과 내연을 잘 풀어낸 작품이다.

 

각을 잡다

 

권영옥

 

모서리는 힘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외출할 때 두 각과 네 각이 동시에 눈치를 본다

나는 새 스카프를 걸치고 쇼윈도에 오래 서서

앙 어깨에 힘을 줄지 말지를 마음에게 물어본다

 

이를테면 모종의 행동 개시에 주춤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

바람을 감고 오는 너는 검은 소가죽에 마름모 퀼팅, 거기에 금빛 체인을

늘어뜨리면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와 그녀, 시간이 막 물드는 사이

 

잇몸을 내보이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하기엔 우리, 유리벽의 습기 같은 각이 각을 딛고 있다

어깨와 어깨 사이에서 안개를 헤치며 다니는 화상벌레에겐

겨울 한나절 볕을 향한

키재기란 얼마나 황당한 높낮이인가

 

카페에서, 금빛 체인에 끌려 다녀 목소리를 잃었다는 말에

나는 스카프를 풀어버렸다

때로 걸치지 않는 알몸에서 오는 가벼움이란 신에게 두 손을 모으는

일보다 각을 수평선으로 떨어뜨리는 게 더 힘들다

 

깊이에 든다, 그날 쇼윈도에 걸려있던 6이란 숫자

 

보는 방향에 따라 6이 9가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지배자의 독성을 감추었던 너,

나는 네 목에 대낮을 짜서 감아주느라고 정신이 없다

 

시적 환기를 생각한다면 첫 연을 매우 잘 잡았다. 각의 결과물은 모서리다. 하지만 그 모서리는 면과 면이라는 힘을 필요로 한다. 화자는 이 부분에 시적 포인트를 두었다. 대부분의 시 작품이 결구에 결론을 내고 첫 연 이하 본문에서 개연성과 당위성의 문장을 만들어 가는 일반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각을 잡다]는 결론을 앞에 두고 결론에 대한 개연성을 만들어 가는 다소 낯선 방식으로 시를 지었다. 물론 결론을 앞에 두는 방식은 상당히 불안할 수 있다. 여타의 시작법에서는 권유하지 않는 시작법이기도 하다. 불안의 부분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은 문장을 끌어가는 힘이다. 외곽에서 시작하고 내곽으로 들어오는 방식을 택한다면 ‘각’의 외형에 대한 묘사가 정확해야 하며 내곽으로 들어올수록 성찰의 깊이가 조밀해야 한다. 시라는 작품은 그저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화자의 생각을 주입하여 같이 공감해야 그 생명력을 갖게 된다. 공감은 필자가 누누이 강조하지만 사고의 깊이가 깊을수록 , 세상을 보는 눈이 경계 너머를 볼수록 짙어지게 되는 법이다. 내곽으로 들어올수록 조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달리 생각하면 외곽을 묘사하는 것은 부산물로 인해 파생되는 주어에 대한 보조관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에 내곽의 성찰을 쉽게 건드려도 안 될 것이며 개연성이 없어서도 안 되는 미묘한 기술적 언술 방식을 내포해야 한다. 권영옥의 작품이 그렇다는 말이다.

 

외출할 때 두 각과 네 각이 동시에 눈치를 본다

나는 새 스카프를 걸치고 쇼윈도에 오래 서서

양 어깨에 힘을 줄지 말지를 마음에게 물어본다

 

화자가 말하는 각의 의미로 도달하기까지 두 각과 네 각이라는 모호한 각을 던져놓고 이하 연에서 두 각과 네 각에 대한 상투적인 행위를 밑밥처럼 놓아두었다.

 

이를테면 모종의 행동 개시에 주춤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주춤이라는 것에서 발생하는 모티브를 생각해보자. 주춤은 진퇴를 결정하기 전 누구나 할 수 있는 본능적인 것이다. 주춤의 뒤에 있는 것과 주춤의 앞에 있는 것은 아주 다른 양상을 갖고 있다. 내일과 어제 사이 같은 오늘. 각을 잡는다는 행위를 하려는 것은 내일로 갈 것인지 어제로 회귀할 것인지에 대한 망설임이다. 내게 그가 있고. 그녀에게 내가 있다고 가상의 전제를 할 때 더 확장하여 생각하면 이별과 만남 혹은 지속의 관계를 결정하기 위한 주춤이 된다. 주춤에 대한 이유를 화자는 무덤덤하게 이야기한다.

 

잇몸을 내보이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하기엔 우리, 유리벽의 습기 같은 각이 각을 딛고 있다

어깨와 어깨 사이에서 안개를 헤치며 다니는 화상벌레에겐

겨울 한나절 볕을 향한

키재기란 얼마나 황당한 높낮이인가

 

위 모든 문장은 다 버리더라도 황당한 높낮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황당이라는 단어의 어감에서 독자는 각에 대한 주춤을 이해하거나 혹은 공감하거나 할 것이다. 아무리 키재기를 해도 별에 닿을 수는 없다. 하지만 늘 우리는 키재기를 하며 산다. 관계와 관계 앞에서, 사람과 사람 앞에서, 하지만 모든 행위의 결과는 늘 황당 그 자체다. 각을 잡는다는 것은 황당을 더욱 구체화할 수 있다. 황당함 * 황당함을 만들 수 있는 것이기에 주춤하는지도 모른다. 겨울 한나절 별 앞에서.

 

깊이에 든다, 그날 쇼윈도에 걸려있던 6이란 숫자

 

보는 방향에 따라 6이 9가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지배자의 독성을 감추었던 너,

나는 네 목에 대낮을 짜서 감아주느라고 정신이 없다

 

보는 방향이라는 말에 주목하게 된다. 거창하게 一切有心造를 들먹거리지 않아도 보는 방향, 위치 각도에 따라 사물의 현상은 다르게 보이며 다르게 인식된다. 각을 각으로 보는 것과 각을 覺으로 보는 것의 인지적 차이는 6과 9에 대한 관념적 의미를 양산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품의 깊이는 /깊이에 든다, 그날 쇼윈도~~/에서 추정할 수 있다. 그 지점에서 독자가 인식하는 것은 몰개념과 개념의 차이가 보는 방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치 말을 잘하는 것과 잘 말하는 것의 차이가 극명하듯 권영옥의 작품은 독자에게 자신이 느낀 각에 대한 방향성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시의 묘미라는 것이 이런 방식의 잘 말하는 것 아닐까? 일상어 혹은 평글로 문장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평글 속에 사유가 깊이 들어오거나 스며들게 한다는 것은 화자가 곡진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반증이다.

 

두 번째 작품은 이은서 시인의 [히프노시스. 2]라는 작품이다. 주지하다시피 가수를 이야기한다. 일종의 반수면 상태, 잠결, 무의식적인, 인위적인 최면에 의한 잠, 몽환 등등을 hypnosis라고 이야기 한다. 몽환은 꿈과 환상이다. 몽환에서는 무엇이든 말들 수 있고 무엇이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안과 밖이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안과 밖은 무엇을 기준으로 안과 밖이라고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안을 기준으로 밖인지 밖을 기준으로 안인지, 어느 때는 기준의 혼란으로 인해 더 확장하여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 현재와 과거, 미래와 오늘이 혼선을 빚을 때가 있다. 벌어진 일인지, 벌어지고 난 후의 ‘지금’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나 상태가 충격적으로 다가오면 어느 경우엔 가수 상태가 될 수 있다. 아니 그 가수조차도 현실인지 가수인지에 대한 인식의 결정을 못할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 현실과 과거, 미래와 오늘의 경계선 상에서 인식을 인식으로 이해하거나 반대의 경우 거나 시인이 꾸는 히프노시스의 맥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추론하는 느낌으로 시를 읽으면 이해하기 한결 쉬울 것 같다.

 

히프노시스. 2

 

이은서

 

누워있는 사진에서 물이 흘렀다

그럴 때 목선의 기울기는 순결한 비율이 된다

 

예고 없이 떠난 발자국들,

물의 각운은 발등을 쓰다듬어 외롭다

 

내가 모르는 것들은 내 귀를 훔쳐간 썰물의 주소를 따라가고 나를 붙잡는 것들은 슬픔을 잘 보기 위해 창문을 오려낸다 만약 저무는 것들이 예쁜 계절이라면 누군가 절룩거리던 내 드라마를 다녀간 것

 

그물 깁는 사내의 팔뚝엔 건지지 못한 수심이 비릿하다 바람이 자정으로 불면 서쪽에서부터 파시시 꺼지는 사람들, 물의 색이 빠져나갈 때마다 파랑의 배경이 되는 생물은 눈망울이 기르는 먼 나라가 된다는데

 

아름답기 위해 오독해야 하는 수평선 끝에서조차 사랑은 살아남기 어렵다 눈을 감고 백까지 세면 핏물처럼 뜨거워지는 비화들, 흰모래로 쌓였다 아무도 연대한 적 없는

 

물의 굳은살이었다

 

시의 전체적인 기조는 시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해체 시의 형태를 많이 구상한 듯하다. 보이는 현상의 모든 객체를 히프노시스 상태를 염두에 두고 조리개를 맞춰야 그나마 초점이 생길 듯하다.

 

목선의 순결한 비율, 누워있는 사진, 예고 없이 떠난 발자국들, 이 모든 구성 요소가 가리키는 방향은 어딜까? 결구를 먼저 본다. 물의 굳은살/ 물에는 굳은살이 없다. 굳은살은 잦은 마찰로 손, 발바닥이 부분적으로 두껍고 단단하게 된 살을 말한다. 동시에 곪으려고 딴딴하게 된 살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하한 경우든 정상적이 아닌, 비정상적 현상을 이야기한다. 흘러가는 물, 흘러가는 시간, 흘러가는 감정, 흘러가는 일들, 흘려보내야 하는 사건들로 연계하여 생각하면 물의 굳은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들은 내 귀를 훔쳐간 썰물의 주소를 따라가고 나를 붙잡는 것들은 슬픔을

잘 보기 위해 창문을 오려낸다 만약 저무는 것들이 예쁜 계절이라면 누군가 절룩거리던 내 드라마를 다녀간 것

 

귀를 훔쳐간 썰물의 주소/

창문을 오려내는 것/

저무는 것 = 예쁜 계절에서 귀와 창문과 저무는 것의 자리에 ‘나’를 대입하여 시를 읽으면 화장의 의중이 쉽게 읽힐 것이다. 모든 사건의 주체는 결국 절룩거리던 내 드라마라는 말이다. 내 드라마 속에 존재하던 부품이나 인테리어나, 주연 급 조연의 상대방이나 모두 절룩거리던 내 드라마 속의 것들이다. 하지만 절룩거리는 이 아닌 것에서 위안을 얻는다. 비록 그 위안의 수위가 가수 상태라는 것의 연속이라는 것이 다소 걸리지만.

 

물의 색이 빠져나갈 때마다 파랑의 배경이 되는 생물은 눈망울이 기르는 먼 나라가 된다는데

 

창문, 귀, 저무는 것에서 물의 색으로 돌아온다. 논조의 개연성을 위해 물의 각운과. 썰물과 누워있는 사진에서 물이 흐른다는 것을 암시했기에 시는 다시 물로 돌아와야 맞는 것이다. 그 물에서 물의 색이 빠져나간다. 빠져나간 것들은 눈망울이 기르는 먼 나라가 된다. 매우 좋은 표현들이다. 무채에서 유채로 무의에서 유의로 다시 같은 방식의 환원을 하거나 주고받거나 하는 관계들. 가수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이 허상이다. 모든 것이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들만 모아 놓은 것이다. 정작 내가 볼 것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가 성립된다. 주체와 객체를 당겼다 놓아주다 하는 솜씨가 탁월하기엔 작품을 읽을 재미를 준다. 다소 우울하지만 우울 나름대로 우울한.

 

아름답기 위해 오독해야 하는 수평선 끝에서조차 사랑은 살아남기 어렵다

 

이 문장 속에 화자가 들어있다. 문장 속의 화자는 아름답고 싶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꿈꾸는 상태는 가수 상태, 그렇기에 살아남기 어려운 사랑이 된다. 눈을 뜨면 뜬 곳의 바깥과 안은 분명 다른...

 

물의 굳은살이었다

 

한 번 더 결구를 인용해 본다. 굳은살이 굳은살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그것도 하필 물의 굳은살이다. 물에는 굳은살이 생길 수 없다. 화자는 현재 가수 중이다. 바람이 자정으로 불면 파시시 꺼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 속의 한 사람이다. 잘 말하는 방법을 터득한 시인이다. 설득당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마지막 소개할 작품은 이동우의 [치킨은 철새다]라는 작품이다. 치킨은 절대 철새가 아니다. 치킨은 닭이다. 닭은 절대 철새가 될 수 없다. 작품의 시제는 치킨은 철새다이다. 시를 읽는 관점은 희언법에서 말하는 해석상의 주어에 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앞과 뒤의 개념이 아닌 반대와 반대, 반대로 인해 보이는 정면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작품을 읽으면 작품이 무쳐둔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비틀어진 문장의 배경에 숨어 있는 화자의 의도를 분석해보는 것도 좋은 시작법의 방법이 된다. 마치 거대한 광산에서 몇 개의 사금파리를 캐는 심정으로 상식이라는 호미와 관념이라는 삽을 들고 연금된 언어를 캐내 거꾸로 된 채에 걸러 금을 모은다는 가정을 하자. 어떤 방향이든 금은 나올 것이다. 과정이 어려워서 그렇지. 이동우의 시에는 언어의 벽이 존재한다. 그 벽은 독자들에게 도구를 사용할 것을 강권한다. 그렇다고 강철의 알레고리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벽에 벽을 더하고 장막을 씌운 다음 독자로 하여금 알맹이를 하고 들게 만드는 묘한 힘이 내재한 작품이다.

 

치킨은 철새다

 

이동우

 

배달倍達의 민족, 그들이 도착했다

 

날개부터 먹으면 안 될까요? 안 될까요 라고 하지 말랬지, 해도 될까요

라고 해야지

 

영어에는 싱겁다 라는 말이 없다 그저 It's not salty, 그 말을 긁어내면

바위 소금이 나올 것 같다

 

뼈까지 염지 된 닭은 날지 못한다 소금에 절여진 밤공기

 

씹히고, 우쩍우쩍 씹히고

 

cow는 beef, pig는 pork, sheep는 lamb인데, 왜 chicken만 그대로

chicken일까?

 

한 마리 더 시키면 안 될까요? 안 될까요 라고 하지 말랬잖아, 해도 될까요

라고 해야지, 이 닭대가리야

 

좁은 케이지에서 한 달을 산 영계들, 잘리고 튀겨져서 종이 상자에

차곡차곡 담긴다 화장火葬도, 조장鳥葬도 아닌 그들만의 장례 방식

 

우리는 뼈를 뱉으며 웃었지 고고학자처럼 뼈들을 맞추며, 잘게 씹힌 날개를 회상하며

 

기름 냄새로 범벅이 된 닭장 같은 아파트, 오토바이의 가쁜 숨소리, 알을 낳은 어미는

날지 않는다 날개 접은 오토바이들이 하나둘 철새 도래지로 모일 시간

 

치킨 박스가 죽은 닭처럼 문 앞에 버려져 있다

 

가장 먼저 화자가 만들어 놓은 벽을 하나씩 무너뜨려 보자.

 

배달倍達의 민족,

해도 될까요 라고 해야지

It's not salty

염지 된 닭은 날지 못한다

화장火葬도, 조장鳥葬도 아닌 그들만의 장례 방식

날개 접은 오토바이들이 하나둘 철새 도래지로 모일 시간

 

위 문장에서 보이는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주어를 위한 부사 역할을 하는

문장의 장식들이다. 그 장식 하나하나가 화자의 시적 모티브를 여과 없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당연하지 않으면서 당연한 말을 하는 것, 당연하지 않은 말로, 당연을 설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자칫 말놀이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우의 작품은 말놀이에 멈출 수도 있는 부분을 진중하게 언어를 형상화하며 마치 제시어를 내미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 희언의 종착역은 바로 이곳이다.

 

치킨 박스가 죽은 닭처럼

 

치킨은 철새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을, 철새가 될 수 없다는 것의 반증을, 철새는 날개 접은 오토바이들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화자가 의뭉하게(하지만 진지하게) 놓아둔 것의 단서는 이곳에 있다.

 

cow는 beef, pig는 pork, sheep는 lamb인데, 왜 chicken만 그대로

chicken일까?

 

우리는 기름 냄새로 범벅이 된 닭장 같은 아파트에 산다. 닭장 속에는 암탉이 아니라 닭이 산다. 그 닭에게 튀긴 닭이 왔다. 배달倍達민족에게 배달민족이 왔다. 다시 철새 도래지로 황급히 떠나는 오토바이들, 그들의 철새 도래지는 결국 우리 자신이다. 그런 관점에서 화자는 이런 결구를 우리에게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치킨 박스가 죽은 닭처럼 문 앞에 버려져 있다

 

봄이다. 봄이 성큼 온 것이 아니라. 갑자기 왔다. 이 봄에 자신이 그동안 써온 작품들을 다시 천천히 읽어보자. 과연 내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말하려고 이 작품을 쓴 것인지? 인정받기 위해 쓴 것인지? 세상에서 가장 크게 인정받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말을 잘하지 말자. 잘 말을 해야 한다. 작품으로 무엇을 설득하지 말고 자신이 먼저 설득당해야 한다. 그것이 잘 말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이 혼탁하다. 먼 나라에선 안 좋은 일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상춘의 봄이 오면 부디 바로잡히면 좋겠다. 언제까지 집 안에 머무를 수는 없지 않은가. 독자 여러분의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조용한 세상, 조용한 소리가 그립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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