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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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18회 작성일 20-12-04 22:30본문
책
김수영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 시집 <오랜 밤 이야기>에서, 2000 -
* 2000년 당시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의 그 신선한 느낌이 아직도 새롭다.
회사로 배달되던 조간 신문을 통해 읽고는 들뜬 그 날이 선하다.
좋은 시는 세월이 흘러도 좋은 시로 남는다.
이 시는 굳이 사상이니, 뒷배경이니 하며 궁싯거릴 필요가 없다.
그냥 느끼면 되는 시다.
봄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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