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태우다/최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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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42회 작성일 20-12-13 12:06본문
일기를 태우다
최영숙
불꽃이 글자를 먹는다
허기진 배를 채우듯 한없이 먹어치우는
20년 넘게 끌고 다닌 일기와 편지
그러고도 허전한 듯 폭삭 재만 남은
불꽃의 식욕 앞에서 나는 눈이 맵다
바람이 불고 재티가 날린다
한줌 재밖에 되지 않는 저것이었다
방황과 그리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그때 그 글들
제 살 파먹듯 써내려가던 시절
빨갛게 새운 밤에 비해 타는 건 순간이어서
홀가분한가,
재가 된 젊음아, 지나간 눈물아
아직도 집 안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파지와 일기를 20년이나 10년, 그 언제
다시 태울 날이 오려는지
그날도 바람이 불고 눈이 매울 것인가
마지막 연기가 흩어져 하늘로 오른다
영혼도 저와 같을 것이다
손을 대보니 재에 따스한 기운이 남아 있다
앞산은 겨울인 듯 보이지만 봄이 온 것을 나무들은 안다
- 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에서, 2006 -
* 이 시집은 시인의 유고시집이다.
시인은 2003년 심장병과 합병증으로 인해 4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 시도 병마와 싸우던 그 언저리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우리는 한줌 재밖에 되지 않는 것들을 쓰며 말하며 살아간다.
한줌 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참 슬프고 허무한 일이다.
그러나 진심은 남는다.
봄이 오고, 나무들은 봄의 진심을 알아차리곤 꽃을 피운다.
다 타더라도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것,
그 남을 것을 위해, 오늘도 우리는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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