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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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해 겨울은 낯선 땅에
유목민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짐을 부리지 못했다
낙타가 사막을 건널 적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떠올리는 순간
작은 모래 섬 하나 넘을 수 없었다.
낯선 이방인들이 오고 가는
출입문 밖에 진눈깨비가 날렸다
죽어야 하는 어느 하루가 있다면
오늘 죽어도 좋았다
반쯤 마신 커피잔은 식어 있었고
타다 만 담배는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었다
공허속에 울리는 이명
피아노 소나타의 선율을 채우고
생각은 비우고 싶었다
사랑은 멀리 있었다
매일 아침 눈 비비고 마주 선 사람들은
기억 저편에 사람들이었다
백 년에 한 번 내렸다는 폭설에
버스마저 뜸해지고
눈을 치우고
굴뚝에 열기가 쏟아지는 난롯가에서
소주를 마시는 나와 이웃을 떠올렸다
낙타는 사막을 건너야 하는
태생의 비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발자국을 지우며 가는 길
이정표도 없이 가는 길
그 흔한 돌 하나 던져 줄 수 없는
여기는 사막
진눈깨비 나리는 이방인의 땅 이었다
둘,
사무실 임대차 계약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내실을 짓고 있었다
낙엽은 으슥한 후원의 골목 끝에
가을을 목놓았다
애시녁에 오르지 못한 나무였다
라일락에 둥지를 튼 수세미는
선 체로 말라 죽었다
그 쓸쓸함에 대하여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새로운 둥지를 튼다면
너른 평수와 전용 주차장은 조건이었을 뿐
집 장사에게 팔려 두고 와야 했던 사무실 후원
오월의 밤에 라일락 향기
내 사다리를 오르면서 나눔에 인색했던
담을 넘어온 뒷집 수세미는
큰 상실이었다
참새가 둥지를 텄던
녹슨 자전거를 삼킨 개나리 숲은
두고 와야 했다
새 둥지의 후원에도
라일락과 수세미가 있었다
내 시작 노트의 습작에는
그들의 명사가 종종 시가 되었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대한 반증이
상실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희망의 끈을 놓는 것이었다
아직은 희망이 있었다
묵정밭을 개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축대 밑에 자투리땅에는
상추 토마토 고추 가지 깻잎이
겨울의 문턱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셋,
사람은 늙고
사장들은 시든 파김치 같았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서 종종
눈에 보이는 단면이
그가 걸어온 생을 일축하게 했다
고집스럽다거나
장인정신에 돋보인다기보다
그들이 나보다 먼저 걸었을 시간이
평이하게 다가왔다
나의 직업 세계도
그들의 눈에는 평이했을지 모를 일이다
유난히 과부가 많았다
그것이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별을 했거나
이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있었다
그들은 종종
늦은 오후에 문을 여는 포장마차에서
이른 막걸리를 마시거나
국수를 먹거나 커피를 마셨다
퇴근은 저녁밥을 짖는 5시,
또는 6시에 장바구니를 든 사장이었다
장인어른과 갑장쯤 되어 봄 직한
전기 사장은 호칭부터 정리해야 했다
노인네 하고 부르기도
사장님하고 부르기도 어색한 침묵이
삼계탕을 비우고 일어나는 길에
형이라 부르기로 했다
호칭 하나에 젊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하얀 거짓말이었다
백색소음에 귀가 맑아지는 것이었다
끝에 님자를 붙여두기로 했다
넷,
노인은 말끝마다
죽을 날이 삼 년 남았어 했다
그가 삼 년이 지나면
죽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묵은김치를 덜어내거나
시골 된장을 퍼내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가 출장을 간 사이
그의 문간에
매일 막걸리를 마시는 주정뱅이가
술을 한 병 놓고 갔다
주정뱅이에게도
어머니가 계시면 고향이었다
그리움은
그의 처지에 값싼 동정심이었다
내가 영세민인되 누구를 생각해
친구의 말에는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있었다
처지가 같은 사람들의
암묵적인 동정심이 악수를 하게 했다
계절이 바뀌면 죽을
한 고추나무에 뿌리를 둔 결속이었다
일이 없어 한가로운 날에는
넷 평 남짓한 그의 공간에 엉덩이를 비볐다
청와대에 근무했고
해병대를 나왔다는 그는
태평양 연안의 어느 선창에서 마시던
원두커피와 노을을 그리워했다
그에게 그리움이란
그가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그 젊은 날에
향수가 커피를 내렸다
그의 로스팅은
프렌치와 이탈리안의 중간이었다
썼다
다섯,
가난한 자의 먹거리
콩나물과 두부는 지금도 요원했다
두부 한 모를 네 등분하고
다시 한 모에 여덟 조각
그의 기분에 따라 열 한 조각은
그를 읽을 수 있는
몸의 제스쳐이거나 말의 뉘앙스였다
흠뻑 기름을 둘러 튀겨내 듯 굽는 두부
제사상에 오르면
어려서부터 줄 곳 보았던 흔하디흔한 두부였는데
귀하게 여겨졌다
그가 베푸는 막걸리 한 잔이면 넉넉했다
천진한 그의 웃음에 담뿍 찍어
두부를 씹는 맛은 인생의 맛이었다
오히려 그는 술을 즐기지 않았다
그가
코가 삐뚤어 지도록 술을 마시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은 비가 내렸다
비는 어느 계절에 내려도 그리움을 동반했다
그것이 한 때의 사랑이었거나
지금은 연락을 끊고
한 줄의 추억으로 남긴 친구이거나
지금은 세 번째
딸 같은 마누라와 살지만
전실 소생들에게 살갑게 눈 비비던
그리움 같은 것이었으리
그의 농담은 짓궂은 어린아이 같았다
폐부 깊숙이 숨겨 둔 이야기를 감추려는 듯이
음담도 농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섯,
술을 판다고
모두가 작부는 아니었다
남편과의 사별은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무심코 건네는 진한 농담은
그녀의 삶을
비가 온 후에 땅을 굳게 했다
어쩌면 요조숙녀의 코르셋처럼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는 일이었다
손님 이래야 빤한 면면의 동네 사람들
서울특별시는
팔도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심 속에 작은 시골 같았다
모두 그녀의 술집에 모이면
경계를 무너트린 성벽의 돌멩이가 됐다
어느 곳에 놓여도
심지어 새로 담은 오이지에 몽돌이었다
순리를 거부하고
제 쓰임에 돌이 뜨는 손님들은
오이지의 꼴망태 같은 눈총을 받았다
주고받는 농이 지나 칠수록
그녀의 얼굴은 붉은 능소화 꽃이 폈다
단골 메뉴는 청양초를 듬뿍 넣은
얼큰한 두부 조림이었다
매운맛이 없었더라면
두부의 뭉근한 졸임은 너무 싱거웠다
삶을 쪼려 내고 싶은 그 무엇이
하루에 흘린 땀에 보상심리였다
희망을 품은 오후 네 시의 출근
고만고만 풀어지는 자정이 지나면
그녀는 아들을 기다렸다
죽은 서방이 살아 온 듯이
일곱,
점심 먹으려 출근을 한다는
친구의 말이
가슴에 똬리를 튼 뱀의 독설이었다
찬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는 것조차
즐거운 일상이라 생각했다
생선 한 마리 구워볼까
오늘은 닭을 삶아 볼까
계란말이 새우튀김
그러다가 어느 날 점심은
김치전에 술 추렴을 했다
다시다와 미원 맛에 길든
음식점의 입맛에 항명하고 있었다
궁핍의 날들을
밥 못 먹고 살았던 건 아니었는데
이물 없이 지는 저녁이 오면
죄인이 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들은
아버지들은
삶에 불씨를 피우는 숯장이들이었다
아무리 좋은 술도
자주 마시면 독주였다
아침에 모닝커피
점심에 만나는 두 번의 만남이
수평선에 하늘과 땅이었다
해가 질 때는 혼자서 졌다
같은 일을 수백 번 수천 번
수도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은
반복의 일상이었는데
서로 기되고 사는 삶은
늘
메아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세상 희망을 저버리는 날
꽃처럼 홀로 진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나는 어느 선 술집에서
독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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