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를 삶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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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지난 시래기 한 움큼 얻어와 물에 담근다
매운바람이 가슴을 후려치고 지났는지
견딘 눈매가 바스락거린다
시래기가 삶아지는 동안
식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자니
오래전 하늘로 가셨던 아버지가 오신다
아버지 찾아 떠난 동생도 기척을 한다
문밖엔 상처 하나 없는 눈이 내려 어둠이 환하고
젊은 아버지와 어린 동생 다 둘러앉은
밥상머리에는 나도 아직 앳되다
아무리 단단한 것을 삼켜도 돌아서면
금세 물렁해져서 심심한 배를 채우는 것 말고는
근심도 아주 사소하던
담장 위 눈이나 뭉쳐 깨물고
처마 밑 고드름이나 뚝 따서
군입거리로 녹여 먹던 따뜻한 겨울밤이
어느새 부르르 끓어 넘친다
한참을 삶아도 쉬이 물러지지 않는
어떤 고집스런 기억을
손가락으로 자꾸만 짓눌러보다가
푸른 잎에 드나들던
질긴 바람이 다 우러날 때쯤
저승이라고 부르는 목숨 앉혀놓고
뜨거운 시래깃국에
밥 한 그릇 달게 말아먹는 저녁이면 참 좋겠다는
부질없는 바람이나 하는 것이다
댓글목록
그믐밤님의 댓글

시래기로 이입된 화자의 자아는 시래기라는  매개를 통해 이제 세상에 없는 가족을 소환한다.
어둠마저 환했던 식구라는 이름의 따뜻한 공간에 대한 추억은  "한참을 삶아도 쉬이 물러지지 않는 어떤 고집스런 기억"을 통해 환기되고,   "푸른 잎에 드나들던 질긴 바람"이라는 눈부신 이미지로 넘어와 아마도 화자의 눈시울을 붉게 했으리라.
그리움으로  펄펄 김오르는 '뜨거운 시래깃국'과 '밥 한 그릇' 식탁에 올려 지금 이 곳에 없는 아버지와 동생을 위한 부질없어 보이는 마음을 달래보는 화자의 시선이 어쩐지 낯설지 않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잘 감상했습니다, 자운님..
자운0님의 댓글의 댓글

평범한 시에 따뜻한 마음 놓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믐밤님.
시나브로 잊고 살아가지만
어느 날은 문득, 소낙비처럼 그리움에 흠뻑 젖을 때가 있지요.
나이가 드는 것은 그리워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는 것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