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혹은 퇴보] 벙어리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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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편지 / 안희선
잘 계신 것으로 생각하렵니다
어제는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된통 까졌습니다
기다림에 박제(剝製)가 된 몸은
피조차 안 흘리더군요
세상에 무심히 태어나서
유심한 그리움을 간직한 죄가
그렇게 크더랍니다
기다려온 그 무엇이
기대가 아닌,
침묵과 암흑의
벙어리 묵시록(默示錄)인 걸
뒤늦게 깨닫습니다
저야 매일
영혼이 어둡게 흔들리지만,
어제는 비바람 몹시 몰아쳤어도
오늘의 그대는 햇살이 눈부신 날처럼
환한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왠지 저도
꿈 속에 깃든 나의 소망만 부여잡고,
무작정 환해지고 싶습니다
현실의 그대와는 아무 상관없는
내 꿈속의 그대가 있어,
그나마 삶이 덜 외롭기에
말입니다
댓글목록
시앙보르님의 댓글

야, 압권입니다. 앞 동네처럼,
확, 달라지셨네요. 동굴 속에서 짠, 등장하시는 스크린 히어로라 할까요.
(아첨 아닙니다. 선거도 끝났는데요, 이건 신나는 기술입니다.)
벙어리의 편지,란 제목만으로 그려집니다. 청각장애우와 노래방,처럼 쓰윽 심장을 벱니다.
편지의 이미지는 일상적이지만, 우리가 놓친 벙어리, 쉽게 말했던 '벙어리 장갑'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 편지는 자신을 향한 편지일 수도 있겠으나, 허무하게 리턴된 편지가 아니라, 묵시록마저 신전에서
먼지로 전락한 종말에서 서성이는 자를 위한 편지라서 의미가 깊습니다.
마지막 연의 경우, '꿈 속 그대'는 '현실'과 괴리가 있지만, 그 거리감의 역설은 '덜 외로운 쪽'으로
밀려가는 풍경이 잔잔하게 파도칩니다. 뒤집자면, '꿈 속의 내가' 현실의 나를 직시하고 포옹하는
'긍정'으로도 밀려옵니다. 그렇기에 결코 개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개에게는 미안하지만...)
조작을 싫어하는 안 시인님이라서, 저 같은 경우라면, 6연이나 7연에 실물체인 까진 무르팍이나 편지봉투, 혹은
녹이 슨 우체통을 조연 삼아, 잔재주를 부려보자, 이런 상상도 해보며 물러갑니다. ^^
안희선님의 댓글의 댓글

요즘은 써 놓은 글들을 정리하고 있답니다
제 2 시집이라도, (사는 동안 마지막으로) 엮을까 해서요
그간, 잡문 같은 글들을 나름 꽤 많이 썼다고 생각했는데 (한 700여편?)
이래저래 추려보니, 맘에 드는 건 채 20편도 안 된다는..
이것 가지곤 시집 엮기는 난망하고
아무튼, 부족한 글인데 나무람엔 인색하셔서
감사합니다
시앙보르 시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