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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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사람아 사람아* / 시앙보르
잠시 눈이 멀었던 내 출생일을 기억하오
내 독서는 행간을 희롱하고 문장을 추행하는 것이오
빈 거미줄과 고양이가 나를 협박하오
지하 단칸방에서는 반대편 아르헨티나 탱고가 잘 들리오
몸을 가린 옷은 빈티지 영수증 패션
지네처럼 하나 둘 맨발이 늘어가는 중이오
산동네 하나 남은 오솔길을 불도저가 밀었소
그래서 지네에게 암벽등반을 배우고 있소
유리창에서 날리는 파우더는 퇴폐적인 내 몸뚱이를
잘 건사하오
아스팔트를 뒤덮은 음모들은 탈모가 급속히 진행 중이고,
무성한 내 이파리는 광합성 기능을 잃어서
이제 신선한 엽록소가 필요하오
인수봉만한 홍당무를 우걱우걱 씹고 싶소
차들이 필기체로 흘러가고 천정은 너무 뜨겁고,
스프링 클러는 황사를 내뿜고 있소
부동액을 빼고 아예 드라이아이스를 넣을 생각이오
빙점에서 추락해서 저항을 순수하게 잃으려 하오 (순수가 있다면 말입니다)
아파트 화단에서 두 그루의 소나무가 누렇게 말랐소
비가 내리지 않는 화단에 가끔 오줌을 내갈기오
좀비를 먹어치우는 고양이는 이제 과체중이오
여기서는 모두 아스피린 대용 버드나무를 씹소
섬유소처럼 우린 갈라지며 서로 발을 걸고 있소
카페에선 차 대신 당신을 우려낸 찻잔을 깨물고
킹 크림슨의 에피탑을 10년 만에 무덤에서 꺼냈소
이젠 전락마저 전락하고, 죽음마저 타락해서 키스할 기분이 안나오
숫자의 매력은 아인슈타인에서 끝났고 이젠 전멸이오
IP로 존재하는 아바타와 이모티콘이 되었소
이름, 이름, 이름이 대체 무엇이오
익명인 블루투스는 누구하고도 페어링이 되질 않소
매너도 품격도 제대로 망가졌소 (교양은 아니오)
별을 가리는 게 가로등의 술책이오
모든 골목들은 궁지에 몰려 있고,
인화지에서 내 뼈는 현상되지 않소
내 가슴살로 만든 치킨을 케찹에 찍었다가
주둥이 잘린 좀비에게 던졌소
이제 소비될 분량은 이 삼 일이 전부요
일본 이바라키 빛의교회에서 투명한 천사를 본 적이
있소만,
투명해져서 관통 당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성장 호르몬이 발목에 고여 있소만,
여행은 이제 가지 않을 생각이오
강릉 7번 국도와 피렌체와 코펜하겐은,
햄버거와 그레이프소다처럼 슬픈 지명이오
부패를 거부하는 라텍스 콘돔이 비웃고 있소
경첩마저 사라진 상자 속에서 판도라는 굶어가오
첨성대에서 천칭자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소
쇼크 브레이크*는
브레이크가 먹지 않아 좋소
테일 램프를 끄고 도시에 질주하오
여의도와 평양 꼰대 새끼들 !
바람마저 호르몬처럼 고였고 풀은 유감스럽지만 이제
눕지 않소
광화문 트로이목마에서 구원투수는 여즉 내려오지 않았소
장발잔의 은촛대와 자베르 형사의 수갑을 표절하고 싶소
메르스처럼 침입하다 모두 좀비에게 먹혔소
용서를 구하진 않겠소만, 집행은 늘 유예 중이오
당신은 사람이오
인증이 필요하오,
듣고 싶은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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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소설가 '다이 호우밍' 소설 제목 차용
* 쇼크 브레이크 : 몇 분 단위로 벌어지는 사건
댓글목록
안희선님의 댓글

사실, 요즘 같은 때에 그 어떤 상황의식 - 예컨데, 시인 그 자신, 혹은 현실이나 生에서 빚어진
시적 상상력의 대상인 <이상향 ;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일>을 말한다는 거
하루, 하루 먹고 살기 바쁜 이 시대에 참 공허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또 대다수의 일반대중들에겐 관심조차 없는 일이지만, 많은 시인들 역시
그 같은 의식에 시큰둥하지만 (나는 시인도 아니면서 역시, 마찬가지)
그래도, 시인들에게 그런 상황의식마저 없다면 도대체 희망이나마 있겠는가
시인의 상황의식은 폐허 같은 음험한 곳에서 암담을 향해 치닫는 <좀비 같은 사람들>에
이르고 있다고 감히 생각해 본다
이 같은 상황의식을 현시대의 암담함이라 한다면,
시인이 동경하는 표백된 비현실적인? 세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지는 세계)는 차라리
신비롭기조차 하다
황량한 사막 같은 인간세상에 환상을 스치는 시인의 香불이 끝내는 환상이 아닌,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비천한 시안으로 귀한 시를 말해서, 시인에게 미안한 맘도 있지만
현대라는 이 가혹한 시간대를 아무 생각없는 좀비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뇌아적 비애를
통해 그 어떤 인증이 필요한 건 정말 필요하다고도 여겨지는데
그나저나, 고단하고 쓸쓸한 삶의 한가운데서 아직도 그런 꿈을 간직한다니..
꿈조차 없이 살아가는 나는 정말 명실상부한 좀비가 된 것인가? 하는 생각과 맞물려
한참을 머물다 갑니다
tang님의 댓글

자신을 천상의 율과 터울에 있게 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소산되는 땅의 그리고 생염의 의지와 만나고 있습니다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땅 속에서 부화하길 기대히는 희망의 천상 노래는
늘상 생명을 다시 숨쉬게 합니다
하여 땅의 부식을 더 듣게 합니다
한드기님의 댓글

길지만, Por una cabeza 처럼...구구절절 옳으신 말씀
그래도,
머리 나쁜 저 같은 독자는
그래서 짧은 게 조은데... ㅎ
잘 감상하였습니다.
오영록님의 댓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도 깜짝놀랄~~
잘 감상하였습니다.
김태운.님의 댓글

저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훑어보긴 했는뎁쇼
허걱허걱거리다 놀라자빠질 뻔
숨이 콱콱 막힙니다요
조금 쉴 공간이라도 남겨두시지,ㅎㅎ
행간에 놓인 생경한 시어들이 풍성합니다
다음에 한 번 더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

올려주신 리플들, 감사드립니다.
김수영 시인님 '장시'를 읽은 후, 초고 5장 정도로 올리려다, 눈 피로도 상승, 모니터 전기세 낭비라서 줄였습니다.
일주일 정도 틈틈이 끼적였는데, 잠수 탄 후에 다음 주에나 올릴까 생각했지요.
요즘 시편 올리기도 꿀꿀하고,
(꿀굴하다는 게, 몇 분이 궁금해 하시던데요, 시마을 우수상을 비롯해서 '상장' 하곤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몇 몇, 매너 문제랄까, 그것 때문입니다. ^^ )
암튼 '시인이란 누굴까, 시란 뭘까' 연커푸 고민하고 있습니다. ^^
시마을 가입 후, 원없이 '습작' 했으니 5월부터는 혼자서 욕심부려가며 제 스타일을 세워볼 생각입니다.
자세히 털어놓고 싶지만 싸구려 '영업비밀'(?) 이라서, 그냥 열심히 쓰는 수밖에 없겠지요.
들락거리며 가끔 리플 올리고, 감상은 멈추지 않겠습니다.
악성 바이러스 사라지지 않으니, 제가 백신이 되는 수 밖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