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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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바다를 지웠다 / 시앙보르
1.
서울에서 남해안 바닷가는 멀었다
삽십 년이나 걸린 것이다
나일강의 초록과
아무르 강변에서 주홍색 부적과 주문,
프랑스 라스코 벽화를 질주하던 야생마, 조명에 무너진,
잊기로 했다, 바다의 이목구비에는 각도가 없다
풍뎅이 한 마리가 제니의 기울어진 어깨에 내려앉았다
2.
말미잘과 공생키로 한 유령새우는
블라인드를 올리고, 누드김밥 포장지를 서로 벗겨주었다
돌아가요, 새우가 말하고, 놔둬요, 말미잘이 오무렸다
말미잘과 새우 사이에서 유리창이 산란했다
제니의 유일한 친구는 풍뎅이
투구에서 단단한 빛이 니(泥)를 떠받혔다
바다는 태어나면서부터 헤엄을 치고
내장을 보일까봐 납작해진 눈알부터 지운다
3.
화백은 박(朴 이면서 薄) 씨 성이어서,
잘라진 부스러기는 자연히 분말인 니(泥)가 된다
파파, 그대로 그려주세요 저 바다
캔버스에서 프러시안블루가 코발트블루보다 색이 더 세다
미어캣처럼 제니는 종일 바다를 열었고
한쪽 다리가 짧아 지평선이 기울어서 허리를 반대편으로 휘었다
풍뎅이는 해변가에 늘어선 황연석을 침범하는 지의류*를 지웠다
그래서 모래사장은 흰 발목만이 전부,
파도가 물러나며 덮친 풍뎅이를 발목이 낚으며 미끄러졌다
지구에는 풍뎅이와 바다뿐
4.
화백은 바다를 지우기로 했다
변색을 막으려고 뿌린 무우즙과 그 아래 금박과 니를 걷어냈다
흰 물감으로 지워지지 않아
대합껍질과 바다제비똥을 모아서 십 년을 풍화시켰다
호분* 안료를 위해 산양아교를 쑤었으나 불투명이어서
산양의 피를 빼내자 비로소 제니의 흰 블라우스 색이 나왔다
풍뎅이는 제니의 발자국에서 스스로 일어서지 않고
제니를 여섯 개의 손발로 떠받쳤다
까만 몸뚱이를 바다제비 연황색이 덮었다
5.
바다는 뒷문 밖에 없다
온통 흰색이 뒤덮은 캔버스 앞에서
쓰러진 붓을 쥔 채 화백이 잠들면
수면에서 조개껍질을 밀어내며 나타난 얼굴이,
밤새 니처럼 날리면서 지켜보았다
붓이 제 몸에 닿자 따뜻하게 푹 젖었다
새벽녘에 열린 창 틈으로 풍뎅이가 빛으로 새나갔다
6.
제니는 눈을 뜨면 텔레비를 켜기 전에
화백의 신발장이 푹 잠기도록 해수를 뿌렸다
풍뎅이를
댓글목록
한드기님의 댓글

와아~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기립박수!
어케 이리 해박이 겸비된 운율이 술술 나옵니까?
꾸벅
그냥 입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

오래 전부텀 준비한 졸작인데, 김경주 시인님의 비슷한 작품이 있어 지금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차별화, 과제입니다. 속을 좀 더 끓이기로 했지요.
한드기 시인님처럼, 술술 나온 건 아닙니다. ^^
원본은 3페이지 분량인데, 줄여도 줄여도 미련이 남아서, 버리는 연습 좀 더 하겠습니다.
-------------
굴 story / 김경주
어떤 지도에 밤을 표기하면
아무도 모르는 마을에 물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하고
어떤 밤에 아무도 모르는 지도를 펼치면
자신이 알고 있던 마을이 하나 사라진다
1
화가가 수몰 지구 앞에서 화폭을 폈다
오래전 물에 잠긴 마을을 그림으로 복원하는 중이다
세필로 댐을 부순다
어떻게 그림 속으로 수몰된 마을을
다시 데려올 것인가
고민 끝에 먼저
그는 물에 잠긴 마을을 그린후
그림 속에서 물을 점점 비워보기로 했다
2
붓을 그림의 수면 아래로 깊이 넣고 휘젓자
마을이 붓에 출렁 흔들렸다
(그런 밤엔 자신의 뼈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래전 수면으로 찾아오던 마을의 주민이 되기로 했다)
붓은 물속의 마을을 조금씩 화폭으로 옮겼지만
사람들 눈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거 자꾸 그림 속에 물만 채우는 것 같군'
그는 그리는 것을 멈추고
그림 속 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마을이 드러날 때까지 말이야'
3
그림 속에 가득 찬 물로 인해 수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물속으로 내려간 몇 개의 붓이 익사했다
그는 햇볕 아래서 붓의 장례를 치러주고
그림을 다시 마주할 때마다
화가는 그림 속 물 안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뼈로 찾아오는 저녁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가 왜 수몰 지구 앞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소문엔 물속에 아무도 들어가보지 못한 숲이
가라앉아 있다고도 했고
그가 물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이상한 뼈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4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화가는 늙고 지쳐가기 시작했다
'저 물속의 마을을 내 두 눈에 감추어두는 편이 낫겠어'
그는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일단 자신의 그림 속으로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도록
몰래 밤을 하나 그려 넣어두었다
물속으로 밤이 천천히 흘러 내려갔다
그 밤을 그린 탓에
그러나 모든 것이 너무 어두워진 탓에
그는 다시는 그곳을 찾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그 뼈를 찾아
떠나는 나그네가 있다
안희선님의 댓글

지워지기는 커녕, 더 생생해 지는 바다
이 多重, 多衆의 시대에 있어서도 특이한 시는 특이한대로,
빛나는 시는 옛날에 먼저 시를 쓴 시인의 시처럼 빛을 발하고 있단 느낌
- 두 시를 놓고 보자니, 그렇다는 거
잘 감상하고 갑니다
김태운.님의 댓글

김경주 시보다 어렵네요
한번 슬쩍 흝는데 머리가 띵합니다
ㅎㅎ
대단히 애쓰셧습니다
그리고 대단하십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

늦은 나이에, 제 팔자에, 멀리 하던 '시'를 이렇게 고민할 줄 상상도 못했지요. ^^
어렵기만 합니다. 인근 문화센터에서 일본어초급이랑 시창작을 배울까 하다가
시간이 맞지 않아 포기했지요.
정말이지 시마을 '시창작강의실'에서 매일 도움을 받고 감사드립니다.
물론 문우님들의 격려와 올려주시는 시에서도 많이 배웁니다.
습작기라서 여러모로 모자란데요, 아직도 제 스타일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
저만의 스타일, 2016년 화두입니다. ^^
시앙보르님의 댓글

'어오'님 필력도 좋으신데, 감정 삭이시고,
시마을 게시판들, 언론 자유가 있습니다.
못마땅한 부분은, '이름을 내세우시고' 그곳에서 마음껏 화를 푸시기 바랍니다.
왓칭님의 댓글

zz 난 개인적으로 김경주...폼 쩔어요.
도그폼... 스타 같아요...장동건이나 원빈..ㅋㅋㅋㅋ
왜 시인 같지 않고 스타같은건지..
잡초인님의 댓글

시앙보르님에 필력에 다시 한번 감탄 하며
바다는 비상구가 없다는 화백의 그림보다
바다를 지웠다를 쓰신 시앙보르님의 시어가
더욱 멋진 그림으로 다가 옵니다
감사 합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

김경주 시인님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너무 '인상적'이었죠.
밀란 쿤데라를 처음 겪을 때처럼, 제 안의 문법5형식과 삶을 대하는 감수성에 이르기까지 와르르... ^^
충격적일 정도로 인상적 !!
올해 시마을 가입해서 김경주 시인님을 알았으니 말 다했죠.
암튼, 답답해서 졸시 몇 편 올렸는데, 가끔 뜬금없이 욕 먹고 싸대기 맞고(?),... 에구, 나이 먹은 내가 무슨 짓거린가
싶기도 합니다. 제목에 낚였다는 소릴 듣고 이후 좀 촌스러운 제목과 내용으로 고민한 적도 있어요. 물론 자중하면서
많이 배워갑니다. 시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니까요.
탈퇴할까, 다 지울까,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시마을의 애정을 받은 처지에 그건 도리가 아니더라고요.
첨엔, 격려 차원에서 두서 없이 리플 달고 그랬는데, 이게 떡밥 뿌리는 게 아닌가 싶어 그만두었습니다.
격려 리플 올렸다가 싸대기(?) 맞은 적도 있지만, 에구, 어디든 일베층이나 어버이연합은 있지요.
비평 코너는 따로 있으니, 그저 올라온 시들 허물없이 격려해주면 좋지 않을까요.
잘 쓴 시 / 못 쓴 시, 보다는 '서로 다른 시'라고 봅니다. 비평은 정식으로 비평방 이용합시다,가 제 생각고요.
물론 레벨 문제는 있겠으나, 그건 본인의 수련, 환경 문제 아닐까 합니다. 열심히 쓰다보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열심히 쓰시는데 리플이 없는 분 보면 격려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정말 쓰다가도 지우고 맙니다.
떡밥도 관심 없고, 낚시도 관심 없습니다. 서로들 답답해서 올리는 시,
두무지님의 댓글

심혈을 기울여서 쓰신 작품,
좀더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봅니다.
내용 만큼이나 정성을 다하신 <시어>가
너무 다양하고 깊습니다.
바다의 이목구비에 각도가 없는 것,
공부하는 마음으로 머물다 갑니다.
감사 합니다.
프리드리히님의 댓글

박수 짝!짝!짝!
왓칭님의 댓글

어디가나 사람 사는데는 똑 같습니다. 시쓰는 사람들이니까 좀 다를거라고 상상하는 건 자유지만, 참...전 시앙보르님의 시를 두고 한 말은 아님...걍 김 경주가 부러워서..ㅋㅋㅋ,
그래요. 때론 부러움이 상처를 줄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런 댓글들이 많이 달리면..아! 내가 좀 쓰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제 생각인데
시나 뭐나 쓰는 순간 온 세상이라는 독자를 얻는 것 같습니다.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좋은 반응만 보이겠습니까?
사실 전 처음에 리플에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컨베이어 위의 라면이나 과자처럼 쏟아지는 시들을
누가 다 읽을까 싶기도 했고 내가 누구를 위해 시를 쓸 주제가 되나 싶어
누가 내 시를 어떻게 읽든 뭐라고 하든 아예 관심 밖이였어요.
사실 리플 많이 달린 시들 보면
모두 완성도가 높거나 좋은 시는 아닌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래도 우리는 인터넷 공간에 올리니까
독자의 반응을 볼 수나 있지
시집에 올린 글은 내가 만든 우유나 요구르트처럼
고스란히 남의 뱃속에 들어가는 물건이 되겠죠
우린 독자와 직거래를 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관심을 받는거라 생각합시다.
살리에르들이 많아야 모짜르트가 빛납니다.
오영록님의 댓글

오우~~~ 댓글까지 다 읽고
감사만 놓고 갑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

오영록 방장님, 간만에 뵙네요. 낯익은 몇 분이 안보이니까 섭섭하더군요. ^^
늘 활기차고 편하셔서 우울한 시를 끼적이고도 기분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