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코에게 - 이중섭과 백석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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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마사코에게*
- 이중섭과 백석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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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앙보르
무궁화나 계명 혹은 백구,
싸구려 담배 은박지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서귀포와 통영
그리고 부산항을 오래 떠돌았습니다
1956년 정초,
거친 숨을 내뿜던 황소는 이제서야 제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개털모자를 쓴 채 콜록거리던
그분의 구멍난 양말이 떠오릅니다
그분은 늘 4B 연필이나 붓으로만 제 살을 만졌지요
손가락으로 절 만져주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벌거벗은 당신 그리고
꼬추를 덜렁이던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잠자리와 나비가 날고, 입을 맞추는 물고기와 활개를 치는 게들,
그리고 풀 위를 뛰어가는 토끼는 그대로 한폭의 詩
그분의 입술은 유화 물감처럼
끈적이고,
빛이 없는 곳에서도 단단하게
반짝였지요
제 몸을 활짝 펼치며 부탁했습니다
부산항에 정박한 황소를 질주케
하시고,
서귀포를 방풍림 안에서 달뜨게
하시고
통영에서 시든 벚꽃들을 더워지게
하시고
은빛 물고기가 내 가슴을 깨물게
하세요
개구리가 내 허벅지를 지나 등을
넘어가게 하세요
당신과 거닐었던 해변과 골목을
제 안에 가두어 주세요
그리움을 못이겨 벌판을 질주하다
지쳐 죽은 들짐승 둘,
저는 벌벌 떨면서 차마 폭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찢어지는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분은 저를 외면하고 벗은 몸으로
늘 당신께 들어갔습니다
저는 터지는 울음을 꾹 참았지요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시인은 메마른 목소리로 나타샤를
부르고,
화가는 말라가는 붓으로 마사코를
그렸습니다
이마가 훤한 두 미남자는 평안도
오산학교에서
같은 하늘과 느티나무와 노을과 강물을 보며,
그렇게 붓질을 하거나 시를 읊었지요
시간은 달랐으나 기다리는 나타샤와
당신 덕분으로
빛나는 두 분은
그대로 포개졌습니다
한 분은 소에 올라타 해질녘까지
바다를 왕래하고
또 한 분은 당나귀에 기대어
별지는 남쪽을 바라봤지요
시인과 화가의 일생은 기다림이
아닐런지요
시인은 맘에 들어오는 낱말 하나를
기다리고,
화가는 심장을 적시는 색깔 하나를
기다리지요
그림과 시라는 낱말이 없을 때
모두가 벽화나 노을을 보면서
불렀던 말, 그-리-움 말입니다,
‘ 믿을 수 있는 새로운 방향 ‘ 을 지시하고 행동하는 회화, *
그분이 손으로 처음으로 제 몸에
글 하나를 새겼습니다
그때 제 눈과 몸이 화라락 유채꽃으로
피어났습니다
그분은 저를 당신처럼 동반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제 몸에 새겨진 곡선과
색과 흐느낌 그리고 편지들,
감사드립니다
폭설에 갇힌 나타샤처럼,
떠나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같은 크기와 방향을 지닐 테지요
서귀포와 부산 그리고 통영에서
바다 너머와,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눈길은
늘 한결 같았습니다
1995년 1월, 나타샤를 기다리던 당나귀가 눈을 감았습니다
화가를 태운 소를, 당나귀에 올라탄 시인이 따라갑니다
한 겨울의 눈이 제 마른 몸과,
40여년 전 9월에 떠나서 이젠 뼈대만 남은 향각궁 위에,
하나 둘 떨어집니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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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코 : 이중섭의 아내
*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에서 인용
* 이중섭 편지에서 인용
댓글목록
김태운.님의 댓글

멋진 장문의 시, 그리고 그림을 눈 크게 뜨고 감상했습니다
너무 길어서 시각적 편의를 고려해서 리듬을 살리며 연을 나누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중섭과 백석과 그리고 그들이 사랑한 여인들
감사합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의 댓글

점심, 후다닥 먹고 올라왔습니다.
담배 한 대 덜 태우니까 좋군요. ^^:
제가 읽기에도 난삽해서 연을 가르고 좀 정리를 했습니다.
관련 시들이 워낙 많아서 고민하다가 거꾸로 사고를 좀 쳤는데요,
신파조라서 좀 놔뒀다가 감상은 걷어낼 생각입니다.
즐거운 오후 되세요, 김태운 시인님 !!
안희선님의 댓글

저도 Heaven.com을 통해서, 이상을 비롯해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께
이따금 이 메일을 띄웁니다만 (Believe it or not)
올려주신 정갈한 시를 대하니, 저 역시 이중섭 화백과
백석 시인이 떠오릅니다
귀한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시앙보르 시인님,
===================================
편지 - 이중섭(李仲燮) 화백에게
어느덧, 세월은 흘러 幽明을 달리하신지 반세기가 넘었군요.
솔직히 그림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지만, 당신의 손끝에서 빚어진
처절한 아름다움은 이 천박한 두 눈에도 심상치 않더군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절벽 끝 같던 그 시절, 순수한 예술의 오기
하나로 버티며 철저히 외로운 화가였던 당신은 그러나 모질게
불어치는 世波에 목숨까지 내어 주셔야 했지요. 정신을 지탱하기엔
너무 약한 육신이었지요. 그렇게 죽은 후에야, 비로소 천재화가가
될 수 있었고 그림 속에 잠자던 당신의 朝鮮 소들은 굉음 지르며,
눈들을 부릅 떴지요. 하지만, 죽음 후의 명예란 얼마나 공허한가요.
침 튀기며 칭송하는 후세의 찬양들이란 그 얼마나 헛헛한 것인지요.
공연히 罪스럽더군요. 당신의 그림을 보는 내 눈이 미안하더군요.
결국 당신이 있는 不歸의 먼 하늘은 지금의 세상과는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데, 살아남은 당신의 소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요.
단 한 번의 자유를 위해 죽어간 당신 앞에서, 그 소리 안 나는
완벽 앞에서 우리들에게 부끄러운 소름이라도 돋게 하고 싶은 건가요.
밥 없으면, 라면을 먹는 이 시대에 당신의 가난과 질병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렇게 죽어간 당신만 억울한 것 아니겠어요.
근데요, 근데요,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이 무지막지하게 쓸쓸하고
캄캄해지네요. 한 치 앞이 안보이네요. 차라리 가난 속에 따뜻했던
당신이 현명했던 것인가요. 당신의 그 혹독한 외로움이 오히려 더
生氣로운 삶이었던 것인가요. 대답 좀 해주세요. 네?
==============================================
백석의 시를 만났다. 아니 백석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 옳다. 시는 바로 그 사람이니까.
표지에서 그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 모양이 참 특이하다.
그 옛날에 이런 머리를 할 수 있는 그의 감각이 얼마나 현대적인지 옛사람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반갑기 그지없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는 격조였다.
그의 시는 다른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격조를 느끼게 했다.
신경림 시인은 백석의 시집 <사슴>을 읽은 저녁, 밥도 반 사발밖에 못 먹고
밤을 꼬박 새웠노라고 고백했다.
신경림 시인처럼 백석의 시 한 편이, 아니 시 한 연, 한 행이 주는 전율을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그 전율이 주는 행복을 누리면서 나 역시 밤을 밝혔다.
백석의 시는 시어가 순수한 우리 고유어로 되어있는데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읽으면 가슴에 깊은 떨림으로 남았다.
문학의 위대한 힘을 나는 알고 있다.
시 한 편 때문에 삶을 다시 찾은 사람들, 책 한 권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 이야기는
문학의 힘을 웅변으로 말해주었다.
백석의 이름 앞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백석의 천재성을 먼저 깨달은 사람은 <노리다께 가스오>라는 일본 시인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15년 정도를 당시 조선에서 보내 한국 문인친구들을 많이 두었던 그는
일본 후꾸이현 최고의 시인이라고 하는데 그의 시 <파>에서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의 나"라고 백석을 노래하고 있다. 노리다께의 인품은 매우 고결하고 덕이 있어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는데 화가 이중섭은 그의 도움으로
일본인 여성, 마사코과 결혼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어를 정주 사투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투리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쓰지 않아 묻혀있는 우리 고유 언어에 낯선 우리에게 백석의 시는 각주를 보면서 읽어야 하지만
토속적인 시어로 전혀 어렵지 않은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눈앞에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바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멍멍이 짓는 소리도 들리고 구름이 둥둥 떠 있기도 하고, 시냇물이 흐르기도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불행하게도 우리 세대는 만날 수 없었지만 2004년, 수능 언어영역에서 사상 처음으로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했던 <고향>이라는 시를 통해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의 연보를 보면 1957년 46세까지의 활동이 나와 있고 1963년 52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시인 <노리다께 가스오>는 백석을 추모하는 시를 발표했다고 하는데
실제 사망은 1995년 84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1963년에서 1995년까지 32년이라는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 동안 빛나는 시들을 얼마나 많이 쏟아냈을까. 그 시들은 어디 있을까?
북한은 계관시인 칭호제도가 있다고 한다.
지난 2000년 남북이산가족 첫상봉 때 북쪽의 계관시인이었던 오영재 시인이 가족을 찾아 내려왔지만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등 그의 시 몇 편을 보면 토속적이거나 서정성은 기대만큼 높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그토록 격조 높은 시를 썼던 천재시인 백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찾아보니
30대에 연금중인 고당 조만식 선생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해방 후에는 우익문인으로 활동하다가
상당한 곤란을 겪어 나중에는 북한의 문인인명록에서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수십 권에 이르는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고 창작 집필은 금지당할 정도로
북한문단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한다.
천재시인에게 창작금지는 얼마나 잔혹한 형벌인가.
고 이응로 화백은 감옥에서 끌어올라 주체할 수 없는 창작 욕구를
식사때 나오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아껴놓았다가 간장이나 밥알로 풀어냈었다.
불타오르는 자신의 창작력을 지켜내려 몸부림쳤던 그 흔적들을 보면서
인간이 육신은 가두어도 영혼은 가두지 못함을 보았었다.
백석은 그 고통의 기나긴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어내다 눈을 감았을까.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남아있는 시들이 더욱 더 소중하게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하다.
전반부에서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가는데 후반부에서는 시인 자신의 얼굴이 지나간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어떻게 이런 시상을 떠올려 시를 쓸 수 있을까.
이 부분을 읽고 있으면 천재시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마치 누군가 읊어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과 평론가 등 문인 120명으로부터 2년 연속 '지난 1년 가장 좋은 시'로 뽑힌 시를 쓴 문태준 시인은
그 시를 쓴 뒤 탈진할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백석도 그렇게 힘들게 시를 썼을까.
아니면 떠오르는 시상을 그대로 한 번에 완성했을까.
(앞부분 생략)
-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이런 시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챈 일본의 <노리다께 가스오>는
백석 앞에서 자신은 무명(無名)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내가 시인 백석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가 자야라고 불렀던
그의 연인 김영한 때문이었다.
김영한은 1996년,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부지 7,000평)을 법정 스님에게
조건 없이 시주하여 길상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여인이다.
사찰은 일 년 뒤 완성되었고, 그녀는 시주하고 3년 뒤인 1999년 83세로 이 세상과 하직했다.
대원각은 기부 당시 재산가치가 1000억 원대였다고 한다.
백석은 북에서 1995년 사망했으니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 그들은 영적으로 무언가
연결이 되어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한 말이었다.
기부한 1000억이 아깝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한 그 사람, 그는 바로 백석이었다.
김영한, 그녀는 최고의 천재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연인, 자야였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길목에서 20대에 만난 그들은 비련의 연인들이었다.
백석은 그녀를 위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썼다.
시에서는 슬픔이 느껴지지 않지만 3년 동안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던
그들은 남과 북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자야는 '내 사랑 백석'이라는 저서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전한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여사에게 기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물었더니
영국쯤에나 태어나서 문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다.
시를 쓰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시를, 사람을, 온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았던 그녀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백석이 사랑한 자야를 노래한 시처럼 하얀 겨울에.
백석의 약력을 보면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詩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있었다.
백석이 자야라 불렀던 연인 김영한은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함흥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냉정해서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키지만 백석은 자야 품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갈등한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는데 남북이 분단되어 이것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렸다.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는데 1997년 10월에 결성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그 첫 사업으로 백석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해 첫 시행은 1999년에 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매년 8월을 기준으로 2년 내에 출간된 뛰어난 시집에
시상하는데 제1회는 이상국·황지우 시인이 수상했다.
언어는 그 민족의 혼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일제는 우리 언어를 말살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시에는 정주 토속어를 그대로 쓰고 있어 향토색이 물씬 풍긴다. 언어유희도 없이 담백하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평한다.
백석은 월북한 시인이 아닌데도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은 모두 금지도서가 되어
우리 세대는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분단의 비극이 개인사뿐만 아니라 민족문학사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는 남북 양쪽에서 모두 잊혀졌던 비련과 비운의 천재 시인이었다.
1987년 해금되고 그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면서 이동순 교수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 시선집'을 펴내자 자야 여사가 연락해와 그들의 슬픈 사랑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백석을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평생을 간직하며 살다가 죽기 전에 세상에는 천억 원이 넘는
대사찰을, 연인에게는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릴 수 있는 백석문학상을 남겨주고 간 아름다운 여인, 김영한.
그들의 슬픈 그러나 아름다운 사랑은 남북분단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남북분단이 그의 문학 또한 막을 수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시문학이 얼마나 더 성큼 발전했을까.
생각할수록 분단의 비극이 곳곳에 남긴 손실과 상흔의 슬픔에 가슴이 아파온다.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이었던 백석은 자신의 시처럼 이 세상에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한 시인으로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남겨졌다. 그의 시와 비련의 사랑, 그리고 그의 연인 자야의
고결한 사랑은 세월이 가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어 우리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줄 것이다.
* 자료 출처는 : <'천재시인' 백석의 연인, 자야 >를 참고함
시앙보르님의 댓글의 댓글

외국이시라더니 잠은 언제 주무세요? ^^
잠이 보약인데요!!
위 리플처럼 성깔(?) 있는 화가와 시인을 만나 오래 고민했습니다.
전에 끼적인 시를 버스에서 잃어버려서 갈팡질팡에 완전 사춘기 감상조~~~
고인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천천히 올려주신 자료 참조하면서 다듬어보겠습니다.
고흐도 그렇고 이중섭도 그렇고, 백석도 그렇고, 치열한 삶이 뭔지 많이 반성합니다.
사족으로, 정지용과 이육사까지 조립(?) 하다가 완전 도떼기 시장 꼴 돼서
아쉽지만 두 분은 잠시 쉬시라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
香湖님의 댓글

님의 글은 읽었습니다만
댓글로 달린 안희선님의 글은 눈이 아파 못 읽고
인사만 남기고 갑니다
화창한 날씨처럼 님의 오후도 화창하시길
시앙보르님의 댓글의 댓글

감사합니다. 정성스러운 시들 잘 감상하는 중입니다. ^^;
오영록님의 댓글

참 부끄럽지요..//
저도 오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잘린귀를 한편 끼적였는데요..
얼마나 치열해야 예술이 되고 역사가 되는지요..
잘 감상하였습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의 댓글

늘 여유와 해학이 묻어나와서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편한 기분도 들고요.
제가 더 부끄러워서 많이 다듬겠습니다.
한드기님의 댓글

머리 용량 부족한 저는 ㅠ
참 서사적이고 스케일이 크네요.
그래도 좀 내용을 줄이시면
좋겠다는 바램도 놓으며
이만,
물러갑니다.
현탁님의 댓글

댓글까지 긴 글을 읽다가 ....
언젠가 읽었던 글인데 또 읽어도 눈길이 절로 끌려가네요
백석의 시를 읽고 떨린 적은 없지만
많은 유명시인들이 백석을 보고 배운다고들 합니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

한드기 시인님, 현탁 시인님, 감사합니다.
시는 묵혀가며 다듬을 생각입니다.
백석의 시, 저도 떨림은 없습니다. 다만 너무 맑아서 매력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편한 오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