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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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지하의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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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앙보르
물이 돌아나가지 않는 개수대
역류는 어젯밤의 흔적을 끌어내고
골목에서 올라오는 낯선 고음이 방충망에 걸린다
휘발유 냄새가 난다
냉장고를 열어 유통기한이 지난 기도 祈禱 를 꺼낸다
손가락 사이로 줄줄 새나가는 내용물
글쎄, 뭐였던가
화단에 코를 박은 고양이 꼬리가 전선에 걸리고
행렬로 복사된 아파트 위를 비행기가 지나간다
이제 고여있는 일은 그만두고 싶다
젖은 길을 투명하게 만드는 햇살
인부들이 막힌 하수구에 선통기 강선을 밀어넣는다
강선은 기도 氣道 를 전진하지 못하고 괴성을 내지른다
비켜주세요, 옷 버립니다
하얀 헬멧이 주변을 밀어낸다
진흙이 튄 껍질을 만져본다
휘어지려면 꼬리를 포기해야 한다
원을 그리던 강선이 조금씩 허리를 편다
지하에서 죽은 고양이 울음이 서서히 잦아든다
헬멧을 벗은 인부가 소리친다
빙고! 물이 쭈욱 빠져나가
고물을 수거하는 확성기가 물이 떠나는 소리를 지운다
집 안에는 죄다 버려질 것들 투성이,
수거차 짐칸에는 확성기 안내만이 그들먹하다
올라가지 못한 기도도 재활용이 될까
뻥 뚫린 하늘이 참 곱다
댓글목록
책벌레09님의 댓글

"물이 돌아나가지 않는 개수대
역류는 어젯밤의 흔적을 끌어내고
골목에서 올라오는 낯선 고음이 방충망에 걸린다"
깊은 언어, 머물다 갑니다.
"뻥 뚫린 하늘이 참 곱"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시앙보르님의 댓글

시인님, 감사합니다.
얼굴은 못 뵈었어도 도반의 심정으로 많이 배웁니다.
편한 밤 되십시오. ^^
책벌레09님의 댓글의 댓글

http://blog.naver.com/jmg_seelov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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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운.님의 댓글

역시 지하의 순례자 답습니다
뻥 뚫린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
감사합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의 댓글

감사합니다.
제주 방언의 회복, 잘 부탁드립니다. ^^;
방언의 현대화,랄까요?
말도 안되는 '창조' 적 현대화 말고요.
안희선님의 댓글

순례의 의미
- 여러 성지나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행위
유통기한이 지난 기도
- 하지만 삶의 방편으로 더 할 나위 없이 유용한 것
지하의 막힌 하수구를 뚫는 일
- 직진의 율법만을 위해 휘어지지 않는 강선은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것
개수대(臺)가 폐(閉)수대가 되지 않는 일
- 고양이 울음 소리 같은 선통기 강선의 아픈 비명이 필요한 것
젖은 길을 투명하게 만드는 햇살
- 절실히 원하지만 아무도 그걸 깨끗한 일이라고 하지 않는 것
지상에서 깨끗한 척 살아가는 사람들의 祈禱
- 그 지하엔 온통 버려질 것들로 꽉 막힌 氣道
아멘, 나무아미타불, 알라후 아크바르
- 올라가지 못한 기도(祈禱)가 기도(氣道)를 메꾼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순례야, 그 누군들 못할까
- 종교판에서 비싼 경비로 행해지는 각종 순례여행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 햇살이 되는 순례
- 뻥 뚫린 하수구가 하늘만큼 고와지는 것
아름답다
- 지하의 순례자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

아, 저를 해킹하시면 위험합니다. 잠수(?) 타야 하거든요. ^^
초고가 너무 뒤죽박죽이라서 다듬어서 적당히 들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다른 분들의 상상력(?) 몫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한 배상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ㅋㅋ ( 농담입니다.)
안희선님의 댓글

사실, 남의 시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일
- 해킹이라기보담 공해스런 일
근데, 시인 및 다른 독자들의 귀한 상상력을 침해한 건 아니고
(따라서, 배상청구의 법적 요건은 미미하다고 사료됨)
그냥, 시를 일독하고 즉흥적으로 느껴진 것들을 제 나름 풀어 본 것
- 그니까, 일종의 감상스런 일
로, 여겨주시길요
즉, 이 같은 관점 하에서 시를 말하자면
결국 독자의 낮은 안목으로 해당시에 접근할 수 있는 여러 통로 중에
하나의 통로를 열어 보는 일에 불과한 것
공연히, 시인의 마음만 불편하게 했나 봅니다
함께 글을 쓰는 문우로서 너그럽게 헤아려 주시길요
시앙보르님의 댓글

그러믄요 ^^;
마음, 전혀, 네버, 불편하지 않습니다. 괘념치 말고 편한 시간 보내십시오.
두무지님의 댓글

순례의 길은 힘들 것 같습니다.
수많은 기도는 어디쯤 머물고 있을까요
고매한 시심, 격조 높은 글 속에
잠시동안 빠져드는 기분 입니다.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시앙보르님의 댓글

제가 낯가림이 심한 편입니다. 존경은~~~ 어제 만우절에 적은 것으로 하지요. ^^
땡초입니다만, 두무지 시인님과 이곳의 선배 시인님들 고매와 격조에
부지런히 쓴물단물들을 빼려고 합니다. 득도는 다른 분들 모두 깨우치신 이후에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ㅎㅎ
현상학님의 댓글

휘발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 휘발유 냄새가 난다/고 하고 읽어보시면 어때요?
시앙보르님의 댓글

ㅎㅎ 감사합니다. 단어에 휘달리다 보니 아주 골치가 ~~
시인님 덕분에 초고 한편 쓰면, 거의 절반 이상 걷어내게 됐습니다.
그러니 훨씬 낫더라구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