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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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인간
나는 반려인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
털 난 짐승치고는 순한 편이다
세면대로 데려가 얼굴을 씻기면
투명해지다가 물속으로 녹아버리기도 한다
흰 목덜미를 쥐고 건져 올리면 붉은 생쥐 같기도 하다
후각이 발달한 이놈은 긴 혓바닥조차 냄새를 추적하는 데 쓴다
어쩔 땐 눈썰매를 끌던 기억을 컥컥거리기도 한다
구석에 웅크려 있기를 좋아하지만
오래전 누군가 성산포로 데려가
해삼 한 토막과 소주를 마시며
이놈 등허리를 쓸어준 적도 있다
나는 그자가 인어일 거라 생각한다
발이 녹아 사라졌으니 잠자리가 잠시 등비늘을 핥아주었는지 모른다
딱히 이놈은 주인을 알아보지도 않는다
고양이처럼 지붕에 올라 달을 핥아먹기도 하고
죽은 별을 꺾어 먹기도 한다
이놈이 나에게 목줄을 걸고 마실을 나가기도 하니까「난」
뭐지?, 그럴 때가 있다
더러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가르랑거릴 때
목구멍 너머에 빨간 쥐들이 보이기도 한다
몹쓸 이놈 털에는 무기력이 붙어 있기도 하고
견고한 척하는 비듬이 슬기도 하는데
치명적인 재롱은 사면발니처럼 사타구니로 기어와 아첨한다는 거다
가려움 때문이 이 한 마리가 견딜 수 없이 징하지만
이것은 사육사가 감당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놈이 만년설을 오를 때는 장엄해 보이기도 한다
발자국만 등을 밀어주는 희디흰 능선을 걸을 때
이놈은 긴 그림자처럼 무겁고 설인처럼 날렵하다
이놈은 라인 홀드 메스너와 히말라야 14座를 섭렵하고
낭가 파르바트 정상을 무산소 단독 등반도 했다
이놈이 華嚴 세계를 다녀왔다고 眞如를 안다고 떠벌릴 때가 있다
그때 「난」이놈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한다
희디흰 절벽을 경험한 자는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설산 중턱에 이놈을 묻을 것이다
이놈이 이슬이 되고서야 정상은 보일 것이다
만 년 동안 눈 속에 파란 눈 뜨고 산 채로 굳을
이놈을「난」왜 이불 속에 묻어두고
자꾸 흰 꼬리를 잡아당기는지 모르겠다
이제 이놈도 지겹다, 우주 너머 골대로 차버려야겠다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보니
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나는 앞발로 툭툭 쳐보며 굴려보며
베란다 철창에 쪼그려앉아 햇빛을 쪼이는데
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
꺼내놓고 보니, 내가 삼킨 새들이 지은
전생이구나
나는 배가 쑥 꺼진 채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점점 투명하여 밝게 비추는 이불
저 세상이 가깝게 보이는구나
평생을 소리없이 지옥의 내장 하나를 만들고
그것을 꺼내어보는 일
앞발로 굴려보며 공놀이처럼
무료하게 맑은 나이를 꺼내어보는 것
피 묻은 그것,
내가 살던 집에서 나와보는 것.
너무 밝구나 너무 밝구나 내가 지워지는구나
`
誕无님의 댓글

/ 이놈이 華嚴 세계를 다녀왔다고 眞如를 안다고 떠벌릴 때가 있다
/ 그때 「난」이놈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한다
이행을 읽을 때 재미있어 크게 웃었습니다.
개는 사람에게 집착하고, 고양이는 장소에 집착하지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고독을 기다리며가
아니고 고도를 기다리며
뭐 이런 말장난이지요. 인간이 고독하다는 건,
혼자라서가 아니가 단독자로 개체로 태생적으로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운 성산포, 이생진 시는 어릴 적 멋 모르고 좋아했지요. 고독과 해삼 한 토막
등대, 뭐 그런 낭만주의가 좋아보이던지.
개나 고양이는 엑스트라지만,
개는 개성을 잃었고 고양이는 공중을 잃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늦은밤 멸콩하시고, 진여에 드시길 바랍니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아침 여섯시
어느 동쪽에나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 피운다
태양은 수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온 해를 보라
성산포에서는 푸른색 외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설사 색맹일지라도 바다를 빨갛게 칠할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을 한다
그러다가도 해가 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술을 마실 때에도 바다 옆에서 마신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드는 파도소리에 귀를 찢기웠다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어진 적은 없었다
모두 막혀 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감으면 보일꺼다
나간 사람이 와 있는 것처럼 보일꺼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꺼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꺼다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 생각없이 해를 본다
해도 그렇다 날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 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 나니 밤이 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워서
밤이 되어버린다
날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살기 싫어서 퍽퍽 넘어지며 운다
큰 산이 밤이 싫어 산짐승을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리를 차내 버리고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가듯
넓은 바다도 물 속으로.. 물 속으로
밤을 피해간다
성산포 에서는
그 풍요 속에서도 갈증이 인다
바다 한가운데 풍덩 생명을 빠뜨릴 순 있어도
한 모금 물을 건질 순 없다
성산포 에서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바다가 사방에 흩어져 산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 좋은 곳
성산포 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지 않아서 서로가 떨어질 순 없다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피워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워 할 것도 없이 돌아 선다
사슴이여 살아있는 사슴이여
지금 사슴으로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꽃이여 동백꽃이여
지금 꽃으로 살아있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슴이 산을 떠나면 무섭고
꽃이 나무를 떠나면 서글픈데
물이여 너 물을 떠나면 또 무엇을 하느냐
저기 저 파도는 사슴 같은데
산을 떠나 매 맞는 것
저기 저 파도는 꽃 같은데
꽃밭을 떠나 시드는 것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피워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움도 없이 말하지 않지만
어망에 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수문에 갇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갈매기가 물어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하루살이 하루 산 몫의 바다도 빠져나와
한자리에 모인 살결이 희다
이제다시 돌아갈 곳이 없는 자리
그대로 천년만년 길어서 싫다
꽃이 사람 된다면 바다는 서슴지 않고 물을 버리겠지
물고기가 숲에 살고 산토끼가 물에 살고 싶다면
가죽을 훌훌 벗고 물에 뛰어들겠지
그런데... 태어난대로 태어난 자리에서
산신에 빌다가 세월에 가고
수신께 빌다가 세월에 간다
성산포 에서는
설교는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성산포 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 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지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 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 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 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 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 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 나무에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 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 주었다
살백육십오일 두고 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 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동피랑님의 댓글

갈수록 활연님은 사람이 아니올시다.ㅎㅎ
누가 이렇게 쓴 글을 사람이 쓴 시라 할까?
미쳤지, 세상이. 깜깜하지 문단이.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님의 수작을 받아먹는 것으로도 배가 터질 지경,
이 같은 행복한 고민에다 창작의 기폭제 역할까지 해 주고 다녀갔으니
부부가 같이 감사를~^^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두 분 예쁘게 사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래 상사를 앓겠다는,
그냥 잔뜩 써놓고 심심하면 오려내든지, 버리든지.
밤잠 설치는 밤 되십시오.
사모님의 시 안목에 관해서는 무릎을 접었다, 전해 주십시오.
고현로님의 댓글

반려인간, 너무 좋습니다.
실체가 들어날 듯 말 듯...
계속 이런 스타일로 열 편만 써 주십시오. ㅎㅎ
이생진 시인의 건안과 건필도 이자리를 빌어 기원합니다.
1929년 생 시인...극 존경입니다.
그믐밤님의 댓글

<타나토스의 유령이 배회하는 우리의 배후를 보는 피흘리는 부릅뜬 눈이 있다. 근원적으로 시인은 고독한 자이며 이유없이 아픈 자이며 격심한 통증 ㅡ 상처가 크고 깊을 수록 누르고 있는 비명도 크기 마련 ㅡ때문에 환각에 시달리는 자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영매와 비슷하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이 시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 기인하며 한 개인으로부터 내밀하게 시작되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심층으로 가라앉고 있는 근원적 고통의 문제를 환기한다. 활연시의 특질은 이 모두를 내포하고 있다. 강렬한 원색적 이미지의 범람과 심원한 정서의 출처는 그의 풍부한 지적 자산의 규모와 독서의 양을 엿보게 한다. 그의 목적은 아마도 부조리극의 텅 빈 전망을 향한 중얼거림 같은 독특한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시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의 시는 파동이 강하고 격렬한 감각적 이미지들을 공격적으로 배치한다. 난폭하고 비인간화되어 있는 현실세계에 응전하는 그의 방식이리라. 그러나 그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물과 달의 이미저리(수없이 예를 들 수 있지만 생략)들에서 투쟁하고 피흘리는 남성성과는 상대적인 모성과 여성성의 상징들을 읽어내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늘 강한 전사적 시어들과 함께 둥글고 부드러운 환원과 포용의 시어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의 시에 대한 독법은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고요와 소란, 증오와 용서 등 서로 병립할 수 없는 숙명적인 요소들에 대한 깊고 그윽한 탐구를 보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늘 한 번쯤 활연시에 대해 연구 좀 해보자 생각하며 메모해 둔 건데, 오늘 대충 꾸려서 올려 봅니다. 뭐 제가 전문가도 아니니 용서하시길 .. ㅎ
동피랑님의 댓글의 댓글

활연님 작품들에 대한 그믐밤님의 생각이 개인적으로 무척 와닿습니다.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감탄과 환호성만 하였지 이렇게 나름 심도있게 파헤치지 못했었는데 그믐밤님 덕분에
타인의 글을 감상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믐밤님 필력이 돋보인 것도 이와 같은 시력을 가지셨기 때문이었군요.
좋은 시를 보여주신 활연님도 고맙지만 따뜻한 정성으로 쓴 귀한 말씀의 그믐밤님께도 감사합니다.
양철붕어님의 댓글

2인분쯤 비상식량을 키우고 있는 나는 왜 활연님이 바라보는 저 경지를 파름한 산넘어쯤으로 보고 있을까
문장마다 당기고 싶은 간절함
아무리 긁어도 쓸어 담아지지 않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가는 개울물처럼
투명한 글을 읽습니다
생각의 가랑이를 아무리 벌려도 다다를수 없는 활연님 문의 지경에 박수를 보내며
미문을 핥다 갑니다
시엘06님의 댓글

그믐밤님의 글, 동감입니다. 평소에 머리에서만 맴돌던 생각을 그믐밤님은 명확하게
서술하셨네요.
야, 이 방에 들어오니 볼거리가 그야말로 풍성합니다. 활연님 시는 말할 것도 없고 댓글도 좋고, 이윤설,이생진 시인의 시도 기가막히게 좋네요.
호강하고 갑니다.^^
활연님의 댓글

여기는 답글 달자니 민망 거시기하네요.
다양하게 읽어주시고 어이(어처) 구니 없는 찬사를 도배하신 분께 숙여 고맙...
(입에 침은 바르고 쓰셨는지, 아주 쑥국쑥국입니다.)
예전에도 이렇게 뺨을 때린 분(타비오)이 계시었는데 속내를 들키면 무안,
사실 닿지도 않은 지경을 추켜세운, 새빨간 유언비어를 고소할 수도 읎고.
더 잔잔한 물거울 만들어보라는 격려로 읽겠습니다.
얼굴이 화끈하끈.
별똥 남기고 가신 분들께 꾸벅, 37.5도.
(그리운 성산포 원작은 이렇게 다닥다닥 붙은 꼴이 아님, 시집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어서 여러편 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