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벤트 10 >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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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
밤나무골 초상집 앞엔 조화 하나 없었다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전선을 늘이고 천막을 세웠다
방을 붙이고 제수를 만들기 바빠
망자는 가슴에 없었다
어둠이 깔리자 하나 둘 찾아드는 허름한 문상객들
잠시 난감한 인사가 상주와 오고 가고
상가는 차츰 망자의 그림자로 덮여갔다
마당 곁에 이팝나무꽃이 조등에 흔들리고
뒷산에선 밤꽃 냄새가 흘러왔다
생사의 강이 갈라지고 밤이 깊어 가자
망자는 평소처럼 술병을 들고
찾아온 손님에게 넘치게 술을 권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문상객은 어느 새
망자의 손에서 화투를 받아 패를 돌린다
무릎 앞에 떨어져 모아지는 끗발에
조등은 다시 한 번 깜빡거리고
망자는 슬며시 돌아다니며 화투장을 들여다본다
흑싸리 껍데기를 쥐고 서보지도 못한 채
끗발없이 이승을 버텨온 망자는 패에 대하여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쓸쓸히 웃을 뿐이다
차가운 밤이슬에 축축해지는 이슥한 밤
별똥별이 꼬리를 태우며 서편으로 사라진다
흩어진 신발을 찾아 허름히 일어서는 문상객
이미 잊혀진 망자는 향불의 연기를 쫒아
끗발없는 세상을 향해 문지방을 넘는다
밤나무골 초상집 앞엔 조화 하나 없었다.
댓글목록
책벌레정민기님의 댓글

묘사의 힘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문운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이태학님의 댓글

책벌레정민기시인님,저의글을읽어주셨군요,감사하구요, 건필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