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렁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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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정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87회 작성일 15-07-08 07:17본문
수렁에 빠지다
불룩한 산그리메의 지퍼가 열렸다. 그 열린 틈새로 발그레한 햇살덩이가 쑥 삐져나온다. 눈 부신 햇살에 몇 날 며칠 굳게 닫혔던 문이 한겹씩 열리고 풀잎마다 영근 이슬에 눈이 아롱거린다. 연녹색 풀의 맥을 따라 흐르는 천상의 눈물, 어느새 내 걸음은 풀잎에 어른대는 수만의 태양에 취한다. 나는 단정한 아침을 물리고 외딴 집이 있는 호숫가로 간다. 당신과 파란 하늘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한 때가 언제이던가?. 당신과 손잡고 오르던 나지막한 언덕, 이제 그리움도 가고 없는 언덕에서 아련한 기억 한장 들춰내니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 콧등을 타고 넘는다. 연막처럼 번지는 호숫가 물안개, 진녹빛 배경을 듬성듬성 지워내고 있다. 두툼한 베일을 벗고 다시 엷어지는 물안개, 인적 끊긴 호숫가에 멀리 산새소리만 똘망지다. 호숫가로 길게 이어진 선명한 발자국, 둘이 아닌 하나의 긴 흔적, 남몰래 먼저 앞서간 세월이었다. 잔물결에 넘실대는 고운 빛.
물이 맑다고 빛이 곱다하여 꿈을 꾸듯 무심코 내딛는 내 걸음은 호숫가 무른 진흙에 빠져들었다. 나에게 있어 늪이고 깊은 수렁이었다. 물이 빠지고 속을 드러난 진흙 수렁, 수렁에 빠진 발목을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버둥일수록 헤어날수 없는 내 일상처럼, 더 깊게 박히는 발목, 그대로 발목은 잡혀 있었다. 다시 돋아날 아름다운 앞날을 위해 깊이 빠진 발목을 건져내야 했다. 나리꽃 핀 드넓은 초원에서 삐쫑삐쫑 노래하는 한 마리 새처럼 살고픈 마음, 늘 정확히 분획된 일상에서 한없이 이탈을 꿈꾸는 삶, 속 무른 세상에서 차근히 발목을 빼듯 속에 품은 무거운 짐을 버리고 잰걸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허벅지 근육을 부풀려 깊이 뿌리내린 발목을 빼내야한다. 물을 가득 품은 진흙투성이 호숫가, 발목 잡는 진흙 수렁이 깊을수록 그 흔적은 오래도록 남는다. 호숫가 물이 맑다하여, 빛이 곱다하여 진흙수렁에 다가서지 않으련다. 아직 허벅지가 아프다.
글쓴이 : 박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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