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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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단단히 닮은 여자가 쪼르르 교탁에 선다. 황동규의 시를 읊다가
"이때 쓰여진 시들 중 이런 어마어마한 시들이 있어요"
하더니 싱긋 웃는다. "하지만 아무도 안 읽어요."
"30년 전 세계를 자기 몸에 두르고 다니는 시들이 있지요. 마치 30년 전이 지금 현재인 듯
이야기를 하는 시. 30년 전 겪었던 일을 어제 겪은 일인 양 말하는 시."
그때 나는 기억했다. 내가 시를 썼을 때 쪽지를 받았다.
이십 년 전 자기가 소녀였을 때 읽고 감동 받았던 시들 중 하나 같다고
너무 잘 읽었다고 한다.
나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십 년 전이었다면 훌륭했을 시를 쓰는 것이
내 목적이 아닌데.
시는 술술 읽히지 않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내 시간 들여서 머리까지 썩이고 싶지 않습니다." 라는 쪽지를 받았다.
시를 못 쓴다는 말은 들어도 어쩔 수 없지만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어떤 시를 써야 할까?
내가 시에서 불변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 믿어왔던 것들이
불변이 아니었구나.
돌고 돌아
내가 시를 처음 시작했을 때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과거도 현재도 아닌
미래를 시 안에 언젠가 담고 싶다고 소망해 왔는데,
인공지능으로 영화를 만들어 오려 붙여 백남준식 비디오아트를 해야 하나?
아니야, 그것도 이미 수십 년은 늙었어.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언어 실험을 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나?
블록체인을 시적 언어로 변환해 볼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당분간 채워넣기보다는 비우기만 해야겠다.
댓글목록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건안 하신지요.
필력은 여전 하셔서 예전 생각이 많이 나는군요.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코렐리 시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