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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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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탱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70회 작성일 25-03-09 18:26

본문

나는 신호를 기다리며 보도 위에 서있다. 신호등은 계속해서 자신의 색을 바꿀 것이었다. 한 가지 색상을 고수하다 장렬하게 산화한 예술가의 혼일 것이며, 색의 세계에 머물다 각성한 고승의 해탈일 것이며 사람과 차량의 움직임을 멋대로 봉쇄할 마법사의 지팡이일 것이었다. 나는 아직 내 발길이 닿지 않은 신대륙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신호에 따라 차량이 멈춰 서고 사람들이 보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도미노처럼 파도가 일어 나도 따라 움직인다. 이제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다. 횡단보도 안에 선 내가 주인공이며 강자가 된다. 운전자들은 불빛에 길들여진 순한 짐승이 된다. 신호등이란 철창에 가둬두고 있는 건 우리의 흉포한 야성, 불빛이 바뀌면 들개 무리는 다시 풀려날 것이었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불붙는 색들의 기싸움은 남북으로 나뉘어 사방팔방 끊임없이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순간 신호는 초록에서 빨강으로 바뀌었다. 초록인이 슬어진다. 바다를 가르던 모세의 기적마저도 사라진다. 그러나 그 주검이야말로 비로소 종교가 완성되는 순간, 남녀노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종교라는 신념으로 뭉친 신도들이 다시 줄을 설 것이었다.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지금 황금의 땅인 XX은행 앞에 도착했다. 차들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젠 서로 가던 길을 가면 그만. 그러나 용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나는 다시 초록인의 부활을 꿈꿔야 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나온 길은 신성한 하나의 섬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전도된 젊은 남녀가 시시덕거리며 골목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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