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동 골목길에 두고 온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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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동 골목길에 두고 온 소년
가끔 내 귓가의 오래고 푸르른 피아노곡
첫날처럼이 첫눈처럼으로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골목길은 사람 하나 겨우 지날 수 있었지만
우린 넓은 이파리들 엮어 만든 숲속 사다리보다
푸르게 지나다니곤 했지요.
미로 같았던 그 길을 지나면
널찍한 공터가 있어
구름과 비와 바람이 우리들 해진 옷섶을 스쳐가곤 했답니다.
니가 먼저 때려라.
아니 니가 먼저 때려라.
주인집 애와 나는 한 대씩만 서로 주고 받는 걸로
다툼의 끝을 맺자며 서 있었죠.
먼지가 일고 공터를 둘러싼 담벼락 위로
구경꾼 마냥 새들이 쭈루니 앉아 있었구요.
웃었죠.
그 얘길 듣고 엄마는 아기처럼 웃었답니다.
그래요 우리 걸친 옷은 남루하였으나
웃음은 실개천 윤슬보다 청명하였고요.
첫날처럼이 첫눈처럼 아스라이 다가올 즈음
첫눈을, 첫날처럼 남겨 두고
우린 또 다른 생을 머리에 인 채 골목길 떠나왔습니다.
하, 알 길 없는 시간의 너울 너머
그 애는 후미진 벽지(僻地)로 가버렸고
세월의 외줄 타며,
등 기댄 사랑과 함께 나도 예까지 왔던 게죠.
가끔 생각납니다.
고기동 외딴 달동네에 두고 온
악의(惡意) 없던 주먹 불끈 쥔 채 바라보던 소년.
그리고 꽃봉오리들 강물처럼 흘러가던 그 골목길.
웃었다, 울다, 스며들며 사랑하다 거기 두고 온,
첫날.
첫눈.
댓글목록
콩트님의 댓글

제 마음 머물다 갑니다.
첫날
첫눈처럼
거기,
그 자리,
태엽을 돌려봅니다.
건필하십시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머물 수 있는 시로 봐 주시니,
고맙습니다.
건강, 건필하시길.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어른이 읽는 동화 같아서 마치 숲속의 빈터 같은
청정함에 젖어봅니다.
잘 지내시죠? 너덜길 시인님~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반갑습니다.
오랜 친구의 말처럼
마음이 푸근해지는 말씀,
늘 감사합니다.
건강, 축복이 함께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