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대학문은 붓다가 되어야 한다 - (제4편) * * 나를 미친놈으로 알고 말이야 (부록 상영上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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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대학문은 붓다(우리 인간의 본래 참모습)가 되어야 한다 - (제4편)
사문沙門/ 탄무誕無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공기가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본래부터 있지 않았다면 발견될 수 없듯
본래부터 살고 있지 않았다면
인간은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날 수 없었다(나올 수 없었다)
모든 인간은 지금의 부모가 아니어도 태어날 수 있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인간의 몸을 받기 전)
발견되기(몸을 받기 위해, 태어나기) 위해
몸 없이(전생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기억 상실증에 걸린 채) 본래부터 본래(本來, 붓다 품)에 살고 있었다
질량(육신, 입자와 파동)은 사라져도(죽어도)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붓다)은 이 우주를 아우르며 늘 그대로 상주한다(현존한다)
육신이 죽는다고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인 참나(붓다, 참모습)가 죽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본래 모습, 본래 얼굴) 참나는 언제나 참나 그대로
죽음은 몸 없이 본래 있던 곳으로 본래대로 살러 가는 길,
의치처였던(보호막이었던) 몸을 잃은 채(몸 없이) 우주의 미아로 남는 것
나(깨침)의 말은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을 바로 알자는 참나 운동,
2차원(이승법)에 국한된 시각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해하려 애쓰지 말라
2차원(시/공간)으로 그렇게 들이대면 구원받을 수 없는 영원한 포경이 되고 만다
우리 인간 본래 성품(붓다)은
한限이 있는 2차원에 봉체封滯된 공간적, 시간적, 직선적 해석이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이 출생하든, 출생하지 않던 간에(출생 불출생 간에)
진여眞如는(붓다는, 인간의 본래 성품은) 요동시킬 수 없다(움직이지 않는다)
산다는 건 살아 있는 상태(입자)와 살아 있는 상태가(파동이) 존재하는 것이고,
죽는다는 건 죽은 상태(몸이 없는)와 색과 상이 죽은(소멸한, 입자와 파동도 몸을 잃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산다는 것이다)
몸이(색과 상, 파동과 입자가) 없어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어 순간 이동을 하는 것,
죽음은 순간 이동 점프(차원이 달라지는 순간 이동, 차원을 달리하는 순간 이동)
본래부터 있던 내가(붓다가, 깨침이) 양자물리학(과학)을 증명해 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물리학이 불확실성 원리(대기묘용, 붓다표 공, 붓다의 묘지력)를
수학적 언어로 증명해 내길 바란다(발견하길 바란다)
양자물리학은 나와(깨침과) 똑같은 발견의 영역이지만
물리학은 실험적 발견(학문, 영역)이지,
인간의 몸에 현존(실존)하고 있는 체험적 발견(학문, 영역)은 아니다
양자물리학이 체득의 학문은 될 수 있어도
앉거나 눕거나/ 자거나 뜨거나
인간의 몸과 하나가 되어 몸소 겪는 체험의 학문, 계합의 영역(학문)은 아니다
생멸법, 한限이 있는 법에는
유가 있으면 무가 있고, 시是가 있으면 비非가 있고,
모든 것에 상대법(상대성)이 있다
시간과 공간에 의지해 건립된 것은(생존했던 것은)
한限이 되면 붓다표 공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다(소멸한다)
붓다는 시/공간이 없는 세계
성문화(成文話, 문자 발달= 이론과 논리))가 발전해 선각先覺의 표현도 따라 발달했다
붓다(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는 발전하고 발달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큰 학설이 난다 해도
위대한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붓다)보다 더 뛰어난 학문은 없다
난다 해도 모든 학문과 학설은 평지(붓다,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에서 돌출된 것(평지돌출),
붓다는 발견(계합, 체득)의 학문이지
조건 발전시키는 개발開發, 소발少發의 학문이 아니다
깨침, 탈바꿈, 계발啓發의 학문, 신발견 학문
우리가 배우는 학문은 인간이 죽을 때
어떤 도움도 안 되고, 아무런 의지도 되지 않는 학문이다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붓다)을 바로 아는 학문은 영원불멸, 사후를 위한 대학문
공 없이는 입자도 없고, 파동도 없다
공 없이는 생도 없고, 사도 없다(공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공 없이는 어떤 것도 바로 설 수 없다
일체 만물이 붓다표 범(梵, 공) 아님이 없다
붓다(인간의 참나)를 보게 되면 대기묘용(붓다의 묘지력)에 의해
몸을 시절인연으로 바꾼 내가 방장方丈이며, 총림叢林이 된다
몸을 바꿀 수 있는 이 직로直路는 깨침밖에 없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와 지식보다 앞서
우리 인간은 내면(붓다,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을 더 중히 여기고 가르쳐야 한다
모든 것은 내가 그것이 되었을 때 그것을 바르게 알 수 있다
학력이 보다 나은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스펙이 보다 나은 인성을 만들지 않았다
보다 나은 학문, 보다 나은 자기 계발啓發,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인성을 붓다가 만든다, 갈친다(가르친다)
미래의 대학문은 우리 인간의 본래 참모습(참나)인 붓다가 되어야 하고,
교재(깨침의 도구, 그림 재료)는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그리는 선, 화두를 들고 하는 참선)이 되어야 한다
간화선은 최저의 생활로 최고의 노력을 볼 수 있는 공부(최고의 경지, 붓다를 직접 볼 수 있는 공부, 만날 수 있는 공부, 붓다와 계합하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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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들이님 구독 감사합니다.'
'너나들이님 알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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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모든 인간(만물)의 본래 얼굴,
모든 인간(만물)의 본래 성품, 모든 인간(만물)의 본래 고향,
모든 인간(만물)의 본래 부모, 모든 인간(만물)의 본래 스승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형용어와 수식어, 수많은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에 속지 마십시오.
붓다(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의 본체는 공입니다.
사전적, 학문적으로 배운 그러한 공이 아닙니다.
붓다는 발견의 영역입니다. 체험의 영역입니다. 계합의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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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미친놈으로 알고 말이야
사문沙門/ 탄무誕無
인간이 만든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제도권은)
예수가 처음 설說 했을 땐 그 사회는 그를 미친놈이라 했고,
싣달타가 처음 설 했을 땐 그 사회는 그를 미친놈이라 했다
소크라테스가 만나는 사람마다 "너 자신을 알라"며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 해서 그 사회는 그를 미친놈이라 했고,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을 처음 설 했을 땐
이해할 수 없는 그 사회는 처음엔 그를 미친놈이라 했다
내가 시말 이 창작시방에서 붓다의 노래를 처음 갈겼을 땐
달팽이관과 태양혈이 잘못된 운영자와
아이디를 즐겨 바꾼, 개설한 아바타를 앞세운 자들이
나를 미친놈으로 알고 말이야
십여 년간 악플로 졸라 무자비하게 나를 조지곤 했다(정신적 살해와 온갖 트집을 잡아 고문을 했다)
그런데 말이야
정신을 살해하려는 의도로 작당한 고문(악플)이
당하는 입장에선 졸라 고달팠지만
아! 졸라 좋았어(조아써),
체득하고 계합한 귀한(붓다) 살림살이 내드리며
붓다를 바르게 가르쳐 줄 수 있었거든,
깨치면 반드시 노래(가르침)도 잘하는 부루나가 되겠다고
초발심初發心 때부터 서원(誓願, 발원문)에다 넣었으니까(세웠으니까) 말이야
저기서도 똑같이 형상 없는 형상(모습)으로
여기서도 똑같이 형상 없는 형상(모습)으로
우주 어디에서도 똑같이 형상 없는 형상(모습)으로
시/공간 없이, 어느 차원에서든 똑같이 형상 없는 형상(모습)으로
우리 인간 본래 성품의 본체인 붓다는 공의 입자와 공의 파동으로 중첩되어 있다(대기묘용이다)
우리 인간 본래 성품은 영원불멸 퀀텀, 항상불변 퀀텀
그런데 없다, 그리고 있다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없다
있다와 없다(삶과 죽음)
두 가지 패(대기묘용, 묘지력)를 완벽히 다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붓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자유로운 구조가 붓다표 공,
숫자로 찾을 땐 학문적으로 배운 공은 금방 찾을 수 있다
우리 인간 본래 성품(붓다)의 본체인 공은
학문적으로 찾을 수 있는(발견할 수 있는) 그러한 공이 아니다
체험의 영역, 계합의 영역
댓글목록
정민기09님의 댓글

"붓다가 되"고 싶습니다.
탄무誕无님의 댓글의 댓글

그냥 해보는 소리로는 안 돼!
붓다가 되고 싶다는 말이 둘리 빙하 타는 소리로 들리네요.
심사숙고하지 않고 그냥 툭 내뱉은 말?
간절함 곱하기 구조 십만 두타頭陀와
대발심, 대신심, 대의정(대의문)에 찬 대근기(대강단, 대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위에 저것이 올 곧게 섰거든 선지식을 찾아가십시오.
저를 포함한 일타 강사, 바른 선지식을 찾아가 바르게 지도 받으십시오.
헌데, 이를 어쩌나!
중생은 붓다(선지식, 선각)를 식별할 줄 아는 눈이 없습니다.
중생법(중생 삶), 중생 놀이에만 사로잡혀 사느라
붓다와는 대강 살며, 대충하는 공부론 안 됩니다.
불구하고 대강 살고, 대충 공부하는 것까지는
제가 어쩔 도리, 어쩔 둘리, 어쩔 티비 없습니다.
선돌님의 댓글

귀한 가르침에
머물다 갑니다
탄무誕无님의 댓글의 댓글

제가 귀한 살림살이 내어 드리며
곡진曲盡할 수 있는 건
다 너나들이님 덕분입니다.
알아 주고, 알아 보시며
'귀한 가르침'이라 하시니
너나들이 말이 맞네,
고래 자쥐도 꺼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