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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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대략 35년 전 현장 설치 공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들른 양산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공중화장실에서 나는 오줌을 누며 이런 생각에 잠겼었다.
내 나이 갓 스무살을 넘기던 무렵이었다.
남의 공장 설비 일을 하며 나라는 공장을 가꾸던 젊음에겐 늘 다짐과 보이지 않는 희망 같은 것들이 옷자락처럼 따라다녔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오후, 먼지 이는 작업대 구석에서 드릴 작업을 하다 내 오른손 넷째 손가락 두 마디가 면장갑의 마디와 함께 떨어져나갔다.
작업대 밑에 널브러진 그것을 주워들고 나는 의사에게로 갔다.
의사는 잘린 손가락을 엷은 웃음과 함께 살펴보더니 아주 잘 들고 왔다며 소독하고 마취한 후 바늘구멍만큼의 아픔만 남긴 채 접합해주었다.
나는 실밥 자국이 손금처럼 남아 있는 그 손으로, 내 먼지 묻은 저녁의 발과 손과 얼굴을 씻었다.
내 아내의 물기 스민 손을 매만졌으며 딸과 아들들의 귀와 얼굴을 꽃잎처럼 쓰다듬었고 퇴근길가에 핀 메마른 쑥부쟁이를 잡아보았고 친구처럼 함께 낡은 오래고 해진 책을 넘겼고 저녁노을 스르르 낄 때면 어눌한 시를 썼고,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가끔 아리고 제대로 굽어지지 않는 손가락을 보며, 이렇게 늦은 밤 사랑이 뭔지를 적어보려 애를 쓴다.
애를 쓴다.
댓글목록
수퍼스톰님의 댓글

상처의 흔적이 남은 손으로 소중한 가정에 지지 않는 사랑의 꽃을 심어 피웠고
세상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꺼내 놓는 작업을 그 손으로 하셨네요. 헤아릴 수 없이 넘겼을 세상의 페이지,
그래서 이런 옥시를 탄생시키셨나 봅니다. 감동입니다. 늘 건필 하소서.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늘 좋은 말씀으로 시마을을 지키시는
시인님께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전에 썼던 시를 새롭게
써 봤는데, 좀 아쉬움이 남습니다.
두고두고 고쳐가며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공감의 말씀 감사합니다.
시인님의 건투를 빕니다.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그 상처, 그 흔적을 사랑의 훈장이라 말하고 싶군요.
젊음을 바쳐 열심히 써 내린 삶의 기록이, 대대로 흘러,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질 사랑 ...
고맙게 읽고 갑니다.
너덜길 시인님~
늘 건안 건필하시길요~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늦게 읽게 되어 이제사 고맙단 말씀 드립니다.
요즘 시마을의 분위기 너무 좋습니다.
거기엔 시인님의 왕성한 필력도 한몫하구요.
모든 일 잘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