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칼코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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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358회 작성일 20-07-17 00:02본문
1.
어느 소녀가 비친다. 비쳐야 할 이유가 없는데. 방금 닦여진 거울에서.
거기 멈춰 하고 누군가 소리친다.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텅 빈 전람회 벽에 못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하나 광장으로 걸어나갔고, 익어 벌어진 무화과열매처럼 머리가 바스라졌다. 이쪽 거울 속은 한여름이었다. 선홍빛 피가 콸콸 흘러넘쳤다. 퐁뇌프다리와 미라보다리 사이에서 무명화가가 굶어죽었다.
2.
소녀가 얼굴을 닦자 얼굴이 수건 위에 떨어진다. 소녀의 얼굴 속은 텅 비어 있었으며 그 속에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 몽롱한 빈 벤치 위에 선홍빛 양귀비꽃이 고여 있었다.
두개골을 사정(射精)하는 방법은 무엇이지? 피에 절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실뭉치같은 것 하나, 차가운 포도(鋪道) 위에 놓여 있었다. 白蛇같은 수건이 저쪽 거울로 슬금슬금 옮아간다. 저쪽 거울은 한겨울이다. 뜨거운 진흙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스테인드 글라스 속 어머니의 얼굴. 비늘 한 조각 없이 매끄러운, 덜 익은 살구 하나처럼 시큼한 얼굴. 눈(雪)의 세포가 자꾸 얼굴에 달라붙는다.
자작나무 한 그루 설원 한가운데 서 있다. 실 끊긴 마리오네트 하나가 거기서 얼어 죽었다.
3.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를 벽으로 몰아붙힌다. 참새들이 조준하는 엽총의 총구가 일제히 그를 향한다. 펄럭이는 후박나무 잎새 반대편에는 창백한 쇳소리가 달큰하다. 설탕 몇 스푼을 더 얹었다. 커다란 콧구멍 두개가 깔깔 웃는다. 그는 두 팔을 하늘 향해 쳐들려 하였으나 그 전에 엽총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발사되었다.
4.
내 일기장의 왼쪽 페이지가 오른쪽 페이지의 손가락을 자르면, 오른쪽 페이지는 왼쪽 페이지의 구두를 벗긴다. 살점이 뜯기거나 혹은 각막이 파헤쳐진다. 두 페이지 모두 벌거벗고 있는데도, 왼쪽 페이지와 오른쪽 페이지는 각기 다른 외계어로 채워져 있다. 어느쪽 페이지든 내게 불가해(不可解)하다.
5.
꽝꽝 얼어붙은 투명한 것 속에서 내 얼굴을 꺼낸다. 내 얼굴의 형체를 얼음 속에 남겨 두었다.
내가 뻘겋게 부어오른 얼굴로 반사하는,
얼음 속 각인되어 있는 내 얼굴이,
하얀 천으로 둘둘 감긴 세상 바깥에는 더 큰 세상의 이미지가 산고(産苦) 무릅쓰고
노(怒)한 겹꽃잎 속을 예리한 마찰음으로
여름이 왔음을 수태고지(受胎告知)한다.
댓글목록
피플멘66님의 댓글
피플멘66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읽었어요
정진 하시고
평안강림하시길
늘 기도 합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봄빛가득한님의 댓글
봄빛가득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나는 이제 나의 겨울 속으로 떠나가렵니다.
청록빛 봄은 가고 여름이 왔건만..
유키,
카테리니행 기차를 타고 아무도 손짓하지 않는 겨울 속으로
나는 8시에 떠나갑니다.
* 아르칸젤로의 콘체르토 그로쏘의 향기가 그리워지겠지요. 평안하시고 건필하소서!
(A. Corelli - Christmas Concerto G minor Op. 6 No. 8 - Horst So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