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종이컵 시집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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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예측할수도 없이
저 뜨겁고 씁쓸하게 내리붓는 침몰을
저토록 결연한 가부좌로 받아낼 수 있을까
읽던 시집을 둥글게 말아쥐고 창밖 화단의 남천나무
저 홀로 붉은 불꽃을 쬐는 햇빛의 얼어터진 살갗을 보며
뒷짐을 지고 섰노라면 만져지던 그 둘레, 그 온기를
그것은 표지의 두께다.
쉽게 찢어지고 구겨지는 내용들이 표피로 밀어낸 책의 굳은 살.
세밀한 행간까지 스며들 겨를이 없는 인생들이
밀착의 힘으로 서로를 세우고 있는 책장에
표지로 밀어부쳐 한 칸 설자리를 얻은 뒷모습들,
이제는 한물간 제목들을 풍기며
벽을 지키는 바리케이트가 되어가다 누군가 책 한 권을 뽑으면
그제사 비스듬하게 꽂혀져오는 빈틈에 등을 기대는 사람들
툭 동전 두세 알에 떨어지는 한 잔의 여백이 커피보다 진하다
표지의 두께 안으로 고이는 서너 모금의 숨, 쉼
표지를 열면 달달한 프림 커피가 하얀 김을 올리며
녹슨 거품을 삭이는,
나도 이백원짜리 종이컵 시집을 내고 싶다.
댓글목록
grail217님의 댓글

이야..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요즘은 책 값이 물가 보다 싸지요..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집을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종이컵에 커피향이 시 처럼 달달하게 읽힙니다..
고맙습니다..
^^*..
싣딤나무님의 댓글의 댓글

고맙습니다. 종이컵 하나보다 못한 시집들이 수두룩 합니다.
이옥순님의 댓글

오늘부터 종이컵도 그냥 못버리고
한번 더 살펴 보겠습니다
쉬운것 같지만 남다른 소재
잘 머물렀다 갑니다
싣딤나무님의 댓글

고맙습니다. 시인도 뭣도 아니면서 시를 품고 산다는 것 진짜
바보짓이고 병신짓이고, 흔한 비유로 스스로 진주를 품는
머저리 조개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