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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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494회 작성일 19-11-16 05:56본문
분수대
분수대를 보면 불안하다
로얄 딱새처럼 둥근 무지개 볏을 세우고, 하얗고 뭉글뭉글한 깃털이 쳐져 내릴 듯한
날개를 보면 이내 세상의 모든 목마름을 박차고 날아 가버릴 것 같아
정수기에 종이컵을 받치고 새의 가느다랗고 투명한 발목을 잡는다
달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새파란 알을 더 깊숙이 품으려고 알을 향해
바짝 붙여 둥글린 날개를 본 적이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베란다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아내가 아이 방에서 가져다 놓은 지구의를 돌려보면 금간 알 조각들이
툭 툭 깨지고 젖은 깃털 뭉치 한 움큼이 미어져 나올 것 같은데, 내부에서 껍질 쪼는
소리만 요란한 알은 여전히 부화 중이다.
여자를 품은 적이 있다. 멀리서 보면 하얗고 동그랗기만 하던 여자에게서
깨진 금들이 보이고, 금 간 틈새로 분비물에 얼룩진 내면이 보이고, 그 금에 가슴이 베이기
시작하자 탁란처럼 밀쳐버린 여자, 내 체온과 숨결에 그녀가 부화 되고 있는 줄을
나는 몰랐다.
사랑해, 물의 깃털이 빼곡한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쓴 적이 있다. 바깥보다 안의 숨결이 더 따
뜻할 때 한 획 한 획 드러나는 글자들이 새의 깃털을 파고들었다. 바깥에서 격렬하게 쪼아댄 유리창이
종일 덜컹이다 부리에서 흐른 피로 붉게 물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점점 지쳐가는 새를 본 적이 있다. 새의 날개 자국이 선명한 사막에서 계란 프라이처럼 익어서 버려진
저녁을 본 적이 있다. 부러져서 모래에 꽂힌 나무의 갈비뼈에 널브러진 알의 시간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아직 처절하게 더 깨져야하는 목마름이다. 끝내 닫힌 알 속에서 감은 눈이 썩어가는 아기 새를
볼까봐 불안하게 들썩이는 날개를 바닷가에서 본 적이 있다.
팔레스타인이나, 홍콩, 남미, 어디라도 가장 뜨겁게 들썩이던 껍질 하나가 벗겨져 나가고,
희뿌연 난 막을 찢는 아기 새의 부리가 보일까봐 아침마다 조간신문을 읽는 습관이 있다.
댓글목록
책벌레정민기09님의 댓글
책벌레정민기09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깔끔하게 정돈된 책장 같은
표현력에 감탄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싣딤나무님의 댓글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사합니다.
요즘 정민기님의 시가 다른 느낌의 물감과 조심스럽게 섞여가는 것 같아
참 좋다 하며 읽고 있습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찬 받으니까 의욕이 생깁니다.
브루스안님의 댓글
브루스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창방에서 처음보는 무시무시한 괴력의 필력
대단합니다
싣딤나무님의 댓글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