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의 蘭雪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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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458회 작성일 20-08-19 00:03본문
꿈 속의 蘭雪軒
신 과즙이 혀에 닿는다. 허기진 새의 날개 퍼덕임. 매화는 언제 지는가? 예리한 달빛으로
매화의 혈관을 잘랐는가? 검은 문을 열었는가? 바다를 보았는가? 앙상한 뼈만 남은 촛불이
까맣게 태운 포도나무 줄기를 보았는가? 내가 바라보는 겨울 얼음으로
빚은 나무는 새하얗게 눈이 멀어있었다. 그것은 앙상한 표정으로 싹트는
봉분을 달빛 속에 쌓아
올리고 있었다. 청록빛 짙은 붓질 위에
비늘같은 순금빛 촘촘한 점들, 내가 처음으로
황홀 속에 익사한 밤이었다. 섬이 섬으로
다가오는 소리. 섬이 섬 아닌 것과 부딪치는 소리. 섬과 섬 사이의 거리를
언어로 치환한다면 내 뼛속 깊이
공명하는 폐선의 외침 소리
내 신경 깊숙이 옷 벗을 수 있을까?
서리 깔린 땅 위에 꽃 한 송이가 더 진다. 땅 위에 눕는
것으로는 모자라다는 듯 발로 짓이기고 손톱으로
연한 살을 찢는다. 어머니, 독조(毒鳥)의 부리로 사슴의 배를
갈랐어요. 뜨끈한 내장을 수정 칼로 토막냈어요. 새하얀 눈으로 물들어가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손목을 얻었어요. 끝에 보석 추를 단 채찍으로
비단 옷자락 안 내 몸을 때려오는 것
저 하현달 속에 있어요. 유리종이
투명한 상처에 금 하나 가는 것은
저 혼자 황홀에 겨워서랍니다. 겨울 정원 파르스름한 분수 주위로
누군가 나뭇가지들 하나 하나와
정사를 벌이고 있어요. 바늘 끝이 내 망막 안으로 들어와요. 시각이 좁아져 통점(痛點) 하나로
모여들고 있어요. 해무(海霧)가 날
흐릿하게 해요. 날 높은 곳에 올려놓아요. 뜨거워요.
날 해체시키고 있어요.
댓글목록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창가에핀석류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코렐리님 특유의 섬세함과 서정으로 제 마음이 풀잎 끝에 섭니다.
초입부 질문 형식은 전능자 께서 욥에게 질문하시는 부분이 연상 되어서
매우 신선하고 새롭게 느껴지네요.
허난설헌이라는 인물을 장치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화자 내면에 교차하는
기쁨과 고통의 의미가 자연스레 흡수 되도록 하는 참 깊은 시로 읽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쓰실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네요.
결구는 해체 됨으로 화자가 난설헌으로 일체화 되는
역설로 읽습니다. 코렐리님 만이 쓸 수있는 아름다운 시라 생각하며
몇 번을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읽을 수록 전해 오는 의미가 변화를 일으키는 묘함이 있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제 시보다도 섬세하게 읽어주시는 석류꽃님의 해석이 더 아름답네요.
석류꽃님의 해석을 읽어보면 과연 석류꽃님의 훌륭한 시가 여기서 나오는구나 하고 그 탁견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이런 탁견을 가지고 계신데 시가 깊이와 아름다움이 없을 수 없겠죠.
저는 폐렴이 결핵이 되면서 몇달을 좁은 방안에서 혼자 앓았던 적 있는데, 그때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고통을 황홀로 바꾸는 일뿐이었습니다. 김종길 교수가 말했던 "비극적 황홀"이라는 말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비극과 황홀이라는 두 이질적 요소가 하나로 승화되는 것이 제 시의 일관된 주제라면, 이 경험 때문일 것 같아요.
비슷한 맥락에서 어디로 가지 못하고 톱에 걸려있는 폐선으로부터 황홀을 보는 것도 제 시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된 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붉은선님의 댓글
붉은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도입부의 물음 형식이 참 좋습니다 언어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시인님의 손끝에 저도 한번 매달려 보고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시인님을 만난듯 한 댓글에 눈길이 한참 머물다 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시인님~~~^*^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붉은선님의, 언어에 향기를 입히시는 시작법은 제가 참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품에도 어느정도 기대고 있기 때문에
제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요. 이미 등단을 생각하실 단계에 오르신 것 같아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