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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認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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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418회 작성일 21-01-13 13:33

본문

인식(認識)에게 





내 오랜 친구, 

책상에 앉기만 하면 너를 써재끼던 시절이 있었지.


안개 자욱한 전혜린을 펼치면서

영원히 성장만을 할 것 같았던 헤르만 헤세를 읽으면서

흔들리며 길 가던 파스칼을 넘기면서

파리의 소년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커피처럼 마시면서

그리고, 그리고 아무말도 없었다를 조용히 덮으면서.


국어 선생님이 빨강과 초록의 자필로 도배한 국어책을 들고선

고전과 현대를 통달한 듯 문학을 내뱉을 때도,

그의 교과서가 수년 동안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깨알 같은 주석들을 지렁이처럼 달고 있을 때도.


의심이 생기면 너를 수백 번은 고쳐 썼다.

너를 적다보면 언젠가 너에게 도달할 거라 믿으면서.


해부학교실처럼, 어둔 실습실의 그들처럼 너와 나는,

글들을 만지고 째고 뜯고 꿰매며

매일 혁명을 해대던 책들 속에서 거닐었어.


그러다 가난한 시(詩)를 만나고 사랑을 사귀고 아이를 낳고,


모르겠어.

안전하게 교과서 위주로 가야 했었는지.

그냥 쪽집게 답안지만 외어야 했는지.


모르겠어.

아직도.


그러나

내 오랜 친구.

나를 놓지를 않았음 좋겠어.


우리 사이

아무말도 필요치 않을 때까지.














[이 게시물은 창작시운영자님에 의해 2021-01-26 12:10:05 창작시의 향기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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