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편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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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늘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49회 작성일 22-05-29 18:02본문
꽃 편지지
하늘시
하루를 기록한 장문의 편지를 다 읽어 내느라
단내 나는 타액세포의 손과 발,
그리고 눈 꺼풀의 말초신경까지 끊어 버리려고 할 때 쯤
터벅터벅 걷고 있는 가로수들과 재회를 한다
잘 누워있는 길 바닥의 배꼽을 기꺼이 열어
한 나무가 두 팔을 벌리며 안아 준다 할 때
인기척조차 내지 말라는 보도블록의 하명으로 바람은 숨이 끊어졌다
고마운 순간이 눈꺼풀 찰나의 빛을 꺼고
두 뺨은 몇 방울의 울음을 동그랗게 말아 상기된 볼을 굽는다
일과의 혈투속에 횡설수설 돌아다닌
정맥을 찌르며 숨 가빴던 기억의 파노라마가 멈추기까지
저 나무들도 저린 다리를 들고 푸른 성과를 내느라
마스크에 꽉 찬 숨처럼 뜨거움을 벗길 수 없었겠지
종점으로 가는 목적의 삶을
분명 인식하고 있는 정류장의 저혈압이 어지럽게 기립할 때 쯤
내부 순환로 발목 위로
지하철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계단들이 발자국을 세고 있다
무탈하게 승리한 시간들 안으로
그늘에 섞인 한숨을 골라내어 한 뭉텅이 석양이 다발로 묶인다
노을이 꺼낸 포장지에 나의 표정이 가지런히 놓이자 강줄기는 리본을 길게 잘라
둘 둘 말리는 나를 묶어 한 다발의 꽃이라 우긴다
고맙다
나를
버텨 준 이 순간의 향기, 비록
시
들
어
얼룩졌어도
창틀의 어깨를 투명하게 내 준 맨 뒷자리
덩치 큰 버스의 가슴팎이 너무 따뜻해 나는 일부러 시간을 죽이는 실수를 해야만 한다
가팔랐던 하루의 호흡을 들고 묵묵히 따라왔던 나의 드라이플라워
나를 싣고 떠나가는 버스를 말 없이 배웅해 주던
나를 안아주던 그 나무, 그 길,
그 고마운 편지를 다시 읽으려고
종점은 버스 바퀴를 거꾸로 갈아 끼우고 타액의 원액을 음미하고 있는
나를 막무가내로 굴린다
단잠속에 깜박 젖어 침 흘리는 편지지에
성실하게 밑줄그은 하루를 접으며
고마운 인사가 꾸벅꾸벅 추신을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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